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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 농린이 May 20. 2023

삐뚤한 방울토마토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22

2023년 4월 30일



 오늘도 모종시장을 먼저 들렀다. 여전히 남아있는 땅이 있는데, 첫 농사니 어떤 작물을 얼마나 심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오늘은 짝지도 없어 혼자 선택해야 하는데, 결정장애가 과연 혼자서 괜찮을지 지레 겁을 먹었다. 조기축구 축구대회에 나간 짝지에게 괜히 연락을 했다. 나는 밭에 가는 중이다, 모종시장을 먼저 들리려고 한다, 나는 고추를 살 계획이다,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다-며 의식의 흐름을 줄줄 읊어댔다. 이렇게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입으로 뱉고 나면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사실, 정리되는 건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혼자라는 게 그새 어색해 이번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텃밭을 탐낸다. 아마 근처에 살았다면, 짝지가 아니라 엄마랑 밭에 다녔을 것 같다. 내 상추가 얼마나 자랐는지 나도 아직 보지 못했는데, 엄마는 떡잎을 떼주어야 무럭무럭 자란다며 이미 머릿속으로 가상의 밭일을 시작하셨다. "엄마, 근데 막상 갔는데 애들이 다 죽어있을 수도 있어. 내가 한번 보고 다시 물어볼게." 하며 엄마를 잠시 저지시켰다. 그러니 이번엔 남은 땅에 무엇을 심어야 할지 리스트를 줄줄 읊기 시작하신다. 아직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고추는 두 줄, 가지는 꽃이 열리고 열매가 맺히는 걸 보는 맛이 있으니 꼭 심을 것, 방울토마토는 사진만 찍어도 예쁘니 한 줄을 심어야 하고-. 나는 순간 내 밭이 한 100평쯤 되는 줄 알았다.


 결국 나는 가지 앞에 섰다. 엄마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가지를 잘 먹지는 않지만, 뭐 내가 직접 기르면 먹게 되지 않을까 하는 낯선 기대를 해봤다. 가지는 줄기도 가지색이다.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내가 키울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보라색이 좋아진다.


텃밭 No.229_다시 살아난 상추

 상추들이 다시 살아났다. 역시 생명은 강하다. 지난주 강력한 비바람에 흐물흐물하던 아이들이, 살아난 것은 물론 파릇파릇 잎을 더 키워냈다. 이제는 제법 상추의 모양새가 보인다. 이렇게 기특할 수 없다. 나는 온갖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 다 먹어가며 따뜻한 집안에서 폭신한 이불 덮으며 살아가도 매일 '힘들다, 힘이 든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사는데, 얘들은 비바람이 죽어라고 몰아치고 때려도 물하나 먹고 햇빛만 받으며 이렇게 자란다. 잎들이 아주 탄탄하다. 아기상추의 부드러움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분을 가득 머금어 탱글탱글하다. 고양이도 아닌데 쓰다듬게 된다.


텃밭 No.229_드디어 씨앗에서 새싹으로

 지난주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씨앗을 뿌린 자리에도 제법 많은 새싹들이 올라왔다. 옹기종기 모여서 제법 그럴듯하게 자라고 있다. 잡초를 뽑아줘야지-하며 몸을 웅크렸는데, 웅크렸는데, 웅크렸는데... 큰일이다. 어떤 게 잡초이고 어떤 게 작물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잡초도 이름이 있습니다-"라던 어느 야생화박사님이 생각났다. 지금 내 눈에는 모두 다 작물로 보이고, 또 모두 다 잡초로 보인다. 분명 잎 모양이 다른 두 식물이 같이 자라고 있는 걸 보니, 하나는 잡초인 것 같은데, 구분할 길은 전-혀 없다. 그래, 잡초든 작물이든 일단 무럭무럭 자라라 싶어 내버려 두었다. 다 크고 나면 알겠지, 뭐.


텃밭 No.229_페퍼민트와 바질


 허브들은 생각보다 잘 크진 않는다. 화분에서도 잘 자라니 밭에서는 더 잘 자라겠지 하며 기대를 했는데, 오히려 허브들은 실내에서 키워야 하나 싶었다. 얼마 전 자연보호활동을 하시는 회사 관계자분을 통해 우리나라 야생 박하잎을 선물 받았는데, 밭의 페퍼민트가 떠올랐다. 너도 무럭무럭 자라야 주위에 나눔을 할 텐데, 안 자라면 뭐 짝지랑 둘이 한번 먹고 땡이다. 바질도 잎 하나가 갈색으로 변해 괜히 걱정이다. 그래도 믿는다, 나의 점심 파스타! 



엄마의 두 번째 주문(한적 없지만 주문받은 것 같은), 고추와 방울토마토. 엄마 말씀대로 고추 한 줄, 방울토마토 한 줄을 심었다. 그런데 심고 보니 뭔가 잘못되었다. 토마토가 심고 보니 기울었다. 분명 올바르게 심었는데, 이상하다. 음, 내 눈이 삐뚤어졌나. 하지만 괜찮다, 해바라기처럼 해를 보려고 다시 똑바르게 서겠지, 뭐.




 혼자 오는 텃 밭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시간이 꽤 잘 간다. 혼자 오니 더 집중하게 된다. 바람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 냇가의 물 흐르는 소리, 저 멀리 다른 텃밭의 농사꾼들의 수다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귀에 들려온다. 집에 오니 삐뚤 하게 심어진 방울토마토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 나 때문에 죽으면 어쩌지, 내가 잘못심어서 못 살면 어쩌지. 다음엔 더 심혈을 기울어 심어야지,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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