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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 농린이 May 31. 2023

여름준비 : 옥수수, 땅콩, 노각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43

2023년 5월 21일



 지난주 엄마가 서울에 온 날 수확했던 작물들의 절반은 시댁에 가져다 드렸다. 워낙 산나물이며 채소들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내가 처음 농사를 짓겠노라 했을 때 비웃으시던 시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괜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돈 내고 땅 빌려서 농사짓기 전에 본인 집 옥상에 널브러져 있는 텃밭들이나 키워보라고 하시길래, 두고 보자-했는데 이렇게 잘 자라주니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걸 다 떠나서라도, 시댁의 옥상에 있는 텃밭을 오며 가며 가꾸고 싶은 마음은 한 톨도 없다.)


 오늘은 다른 일로 시부모님을 뵐 일이 있었는데, 시어머니 얼굴을 뵙기 무섭게 텃밭이야기부터 꺼내셨다. 엄마랑 둘이 텃밭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어머니께서 오빠에게 본인도 텃밭에 가고 싶다고 말하신 듯했다. 텃밭이 궁금한 마음이신 건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신 건지, 작물들이 생각보다 괜찮아 거들고 싶은 마음이신 건지, 모든 마음이 함께 이신건진 알 길이 없으나, 시어머니가 직접 나에게 말을 하지는 않으시는데, 오빠를 바라보며 나에게 하고픈 말을 질문처럼 건네신다. 어르신들의 공통된 화법인 걸까? 아버지는 집으로 먼저 가시고, 어머니만 따로 따라나서겠다 하시니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고, 한 번은 보여드려야지 싶어 그러자고 했다. 거절하는 것도 모양이 이상하니 말이다.


 밭에 가기 전 여느 때처럼 모종시장을 들렀다. 고구마를 심고 싶어 고구마뿌리를 사러 간 것이었는데, 고구마는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한다. 늦어도 지난주에는 왔어야 한다고. 사장님께 그럼 어떤 걸 심으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니, 옥수수와 방울토마토, 땅콩을 추천해 주셨다. 방울토마토는 이미 몇 그루 심어놓은지라 옥수수와 땅콩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항상 모종은 3개, 4개 조금씩만 샀었는데, 이번엔 왠지 용기가 나서 한 판을 전부 사버렸다. 옥수수가 크게 자라기는 하겠지만, 한 대에서 몇 개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나눠먹기 위해선 넉넉하게 키워야 할 것 같았다.


 짝지는 갑자기 고들빼기 모종을 찾는다. 사장님 왈 고들빼기는 씨앗부터 키우는 거지 모종으로 나오는 건 없다고 한다. 생전 고들빼기를 찾던 적이 없는 짝지인지라, 웬 고들빼기를 찾냐 물으니 아버지가 키워주라고 했단다. 아버지는 내 텃밭을 저주만 하시더니, 잘 키워오는 걸 보니 또 드시고 싶은 건 생기시나 보다. 괘씸해서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어머니도 계시고, 심술을 부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 땅 한편쯤이야 내어드리지요. 

텃밭 No.229_아욱과 시금치, 끝에 보이는 쑥갓

 작물들은 역시나 풍성하게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자주 와보지도 못하는데 이리 잘 자라주니 또 한 번 고마울 따름이다. 지난주 엄마와 왔을 때 보다 더 많이 자란 듯하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온건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느릿느릿 거북이 같은 오빠와 달리, 어머니는 아주 빠르셨다. 집에서부터 준비해 오신 듯 가방에서 팔토시를 꺼내시더니, 누구보다 빠르게 작물들을 수확해 나가셨다. 오빠가 열무 하나를 뽑으면 어머니는 이미 다섯 개를 뽑아 옆에 쌓으셨고, 내가 물조리개에 물을 한 번 떠 올 때마다 열무는 두 줄씩 줄어있었다.

짝지와 시어머니 / 오늘의 수확물들

 어머니의 일 속도는 누구보다 빨랐지만, 나의 밭을 대할 때는 정중히 대해주셔서 감사했다. 어느 것부터 수확할지, 수확을 어느 정도 할지 다 나의 의견을 먼저 물어주셨고, 모종을 심을 때도 어느 것부터 심을지, 한 줄에 몇 개를 어떤 간격으로 심을지 세심하게 물어봐주셨다. 당연한 것일지 몰라도, 어른께서 배려해 주시는 마음이 느껴져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열무, 시금치, 쑥갓, 아욱, 방풍나물이 있던 자리 전부를 밀어버리고 옥수수와 땅콩을 심었다. 밭갈이를 전부 새로 하고 심는지라 한참 걸릴 것 같았는데,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정말 빨리 끝났다. 어머니께서 밭농사 경험이 있으신 건가 했는데, 이번이 처음이라 하신다. 역시, 세월이 가져다주는 짬인 걸까? 짝지와 둘이 모종을 심을 때면 짝지 하나, 나 두 개 정도의 속도였는데, 오늘은 짝지 하나, 어머니 네 개 정도의 속도다. 전부 다 심는데 20분이 채 안 걸린 듯하다. 


 땅콩까지 다 심고 나니 딱 2개 정도의 칸이 남았다. 마침 모종시장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신 노각오이가 딱 2개였다. 사장님의 선견지명일까? 매주 모종 사러 오지 않냐며 얼굴을 기억해 주시고는, 노각오이도 잘 크고 수확하는 맛이 있다며 키워보라고 모종 두 개를 덥석 쥐어주셨다. 그렇게 땅콩의 빈자리는 노각이 차지했다.

옥수수, 땅콩, 노각



첫 고추 꽃, 하얗다.

 오늘은 고추에도 꽃이 달렸다. 방울토마토는 노란 꽃이었는데, 고추는 하얀 꽃이 핀다. 꽃망울도 몇 개 보이는 걸 보니 다음 주에 오면 더 많이 자라 있을 듯하다. 이런 소소한 행복이, 소소한 듯 소소하지 않다. 밭에서는 땀을 흘리며 흙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집에 돌아오고 회사에 출근을 하면 저 작은 꽃이 아른아른거리고, 심어놓은 모종들은 뿌리를 잘 내렸을까 종일 생각난다. 소소한 행복은 일주일간 옅지만 큰 행복으로 키워져 가슴에 가득 차오르고, 주말이 되면 상사병 마냥 밭에 언제 갈까만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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