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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 농린이 Jun 02. 2023

열무꽃 가득한 여름초입의 텃밭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54

2023년 6월 1일



 어느덧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유월이 찾아왔다. 황량하기 그지없던 텃밭이었는데 여기저기 다 각자의 작물들이 푸르고, 이름 모를 애벌레와 개미들, 요즘엔 찾아보기 어렵던 흰나비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나름 시력이 좋은 편이라 텃밭 입구에 서면 우리 텃밭이 보였는데, 이제는 저마다 키가 꽤 자란 작물들 덕에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지난 주말, 개인 일정으로 텃밭을 들리지 못한 죄책감에 평일 시간을 억지로 맞춰 달려왔는데, 평일인데도 여기저기 사람들이 꽤 보인다. 다들 저마다 텃밭에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가꾼다. 몇몇 텃밭은 주인이 안 찾아온 지 꽤 시간이 흘렀는지, 이미 수확시기를 놓치고 꽃이 피거나 과하게 자라 버렸다. 안타까운 마음에 몇 번이나 손이 먼저 뻗어나가는 오지랖을 참느라 고생이다.



 상추는 오늘도 풍년이다. 이 무시무시한 생명력과 성장력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지난주, 앙상하게 줄기만 남겨놓고 잎을 다 제거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각자의 꽃다발을 한 송이씩 만들어놓았다. 몇몇 텃밭을 보니 상추를 울타리처럼 텃밭의 테두리를 따라 가지런히 일자로 심어놓았던데, 괜찮은 전략이구나 싶었다. 이렇게 모아서 심어놓으니, 잎끼리 겹쳐 자라면 잎을 따기도 어렵고, 일단-무섭다. 이제는 너무 잘 자라서 무서울 지경이다. 내년 농사 때는 참고해야겠다.

 옥수수도 심어만 놓으면 잘 자란다더니, 일주일 새 많이 자랐다. 모종만 봤을 때는 그냥 잡초와 크게 달라 보이는 게 없었는데, 오늘 보니 이파리가 제법 옥수수 잎의 모양을 지니고 있다. 지난주 어머니가 심어주신 아이들은 다 뿌리를 잘 내린 듯하고, 짝지가 심은 옥수수는 절반 정도가 죽어버렸다. 짝지는 내 손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며 시무룩했다. 그냥 모종이 안건 강했나 봐-하며 위로를 건넸지만, 사실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짝지의 손이 문제라고 하기에는, 서비스로 받아서 심었던 노각 2개도 모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호박도 그새 잎을 키우고 넝쿨을 늘어뜨리고 있다. 넝쿨이 어느새 옆 밭에까지 슬쩍 넘어갔길래 조심스레 넝쿨을 주워다 우리 밭 옆 라인으로 돌렸다. 넝쿨이 타고 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줘야 하나 싶다. 잎이 꽤 큰데, 열매가 맺히기 전에 잎부터 따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호박보다 호박잎이 더 먹고 싶으니까, 호박잎을 먼저 먹어버려서 호박이 안 자란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또 언제 변덕이 생겨서 호박이 보고 싶을지 모르니 오늘은 참아보기로 했다.

 사실 오늘 방문의 목적은 '지지대 세우기'였다. 초보 농사꾼들은 언제 어디에 지지대를 세워줘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근처 밭에서 다들 하나둘씩 어디선가 지지대를 구해와서 세워주는 걸 보고 염탐하기 시작했고, 우린 이미 늦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이미 얼기설기 얽혀서 갈피를 못 잡는 토마토들을 위해 긴급구조를 진행했다. 다이소에서 급하게 남아있던 지지대 8개를 모두 긁어모았고, 도저히 주체가 안 되는 줄기들은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그나마 정신 차리고 있는 줄기들을 어떻게 엮어서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방울토마토 4개에 지지대를 세우는데 20분이 넘게 걸렸다. 아무래도 너무 다닥다닥 붙여 심은 탓에 얽힘의 정도가 더 심했던 것 같다. 거기다 바로 옆에 고추에, 가지에, 죄다 붙여 심어놓았더니 주체가 안된다. 큰일이다. 가지는 옆의 비타민을 뽑아버리고, 방울토마토는 또 옆의 상추들을 다 뽑아버리면 공간이 조금 생길 것 같기는 한데, 가지와 방울토마토 사이에 끼어버린 고추가 큰일이다. 고추를 옮겨 심어도 되는지 찾아봐야겠다.

 이 치열한 생존경쟁 와중에도 고추와 토마토가 열리긴 열렸다. 아직은 작고 풋내가 여기까지 나는 듯 하지만, 첫 열매라니! 이 비좁은 덩굴들 사이에서! 기특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붙어서 크고 있다. 줄기가 아니라 덩굴이 되어버린 토마토들을 보고 있자니 미안함이 절반, 답답함이 절반이다. 아무래도 방울토마토와 고추, 가지는 조금 치열한 생존경쟁을 뚫고 열매를 맺어야 할 듯하다. 내년에는.. 꼭... 넓게 심어줄게...!

 오늘은 애벌레를 엄청 많이 만났다. 검은 애벌레, 빨강 애벌레, 파랑 애벌레, 노랑애벌레. 어느 성충이 될 아이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애벌레를 보는 것 자체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토마토 줄기에 유난히 많은 걸 보니, 이 어마무시한 덩굴들이 애벌레들에게는 반대로 보호처가 되어주었던 듯하다. 잘 쉬고 있는데 괜히 내가 방해한 것 같아서,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다시 토마토의 덩굴 속으로 돌려보내줬다. 다음 주에는 나비가 되어있으려나?

 다이소에서 지지대를 사 오라고 짝지를 보냈더니, 짝지는 역시나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지대와 함께 하릴없는 나무 입간판을 사 왔다. 열심히 토마토를 묶고 있는데, 커다란 몸으로 웅크려서 뭘 꼼지락 거리길래 무얼 하나 보았더니, 작물들 이름을 적고 있다. 귀여우니 봐준다.

 

 오늘은 토마토 줄기 정리를 한 게 전부인 것 같은데,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등이 땀으로 흥건하다. 나머지는 주말에 다시 와서 해야겠다 싶어, 돌아가자고 짝지를 불렀더니 대답이 없다. 또 어디서 뭘 하나- 했는데, 남의 밭 앞에 가서 저러고 서있다. 

  "오빠 거기서 뭐 해? 나 더워 빨리 가자~"

  "웅, 꽃구경, 꽃이 이쁘잖아."

 우리 짝지는 오늘 텃밭에서 감성이 터졌다. 주인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꽃을 잔뜩 피워버리고 만 열무밭을 보고는 감성이 솟아난 듯하다. 저러고 한참을 꽃을 자세히 들여보다 돌아온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오늘도 우리 밭은 풍년이고, 오늘도 우리 장바구니는 한가득이다.



 우리 집 냉장고는 내가 자취할 때 쓰던 냉장고를 그대로 가져와서 쓰는지라 정말 자그마하다. 그 말인즉슨, 오늘도 무성히 자라난 저 어마무시한 상추들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거다. 친구, 가족, 동료들 모두에게 나눔을 하고 또 해도 상추가 남는다. 이대로 썩혀서 버리고 싶지는 않아 머리를 굴린 끝에, 나눔을 해보자 싶었다. 상추뿐이긴 하지만, 무농약 유기농이니까 좋아할 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당근마켓에 글을 올렸다. 그리고 5분 만에 신청글이 6개가 왔다. 성공! 그중 바로 올 수 있다는 두 분께 문고리 나눔을 하기로 했다. 저녁 밥상에 올려 맛있게 먹었다는 후기글을 보고 나니 괜히 뿌듯하다. 

 오늘 우리 저녁은 바질 토마토 파스타! 바질이 꽤 많이 컸길래, 이제 파스타를 해먹을 정도는 되겠다 싶어 큰 잎만 골라서 따왔다. 잎이 아주 싱그럽다. 집에 바질 향이 가득하다. 면과 소스는 얼마 안 되어도, 바질을 잔뜩 넣어다 스크램블 에그만 딱 올려서 파스타를 만들었다. 한식밖에 안 먹는 짝지도 웬일로 잘 먹는다. 행복하다.


다음 주말엔 또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밭일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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