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존법을 아시나요?
"김대리 자리에 있나?"
"김대리님 외근 나갔습니다."
"뭐? 김대리님? 김대리가 나보다 윗사람이야?"
"아닙니다."
"김대리라고 해야지"
기가 막혔다. 나에게 김대리도 김대리님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압존법이라는 것이다.
압존법? 높여야 할 대상이지만 듣는 이가 더 높을 때 그 공대를 줄이는 어법. ‘할아버지, 아버지가 아직 안 왔습니다.’라고 하는 것 따위이다.
중학교 때 국어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나에게 대리님도 대리님, 이사님도 이사님이라서 직급+님이라 부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 상사에게는 상하관계가 아주 뚜렷한 기준이 있는 사람이라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결재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제품 주문량이 매우 많은 제품이 A 공장에 있어서 효율성을 위해서 물건을 B공장(우리 공장)으로 가져오지 않고,
A 공장에서 출고하라는 상사의 지시가 있었다.
그 후에 제품 생산팀 과장님이랑 재고 확인하다가
제품이 A 공장에 없고 C 공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재를 해 준 이사님에게 물어봤다.
이사님 말대로 A 공장에서 출고하기로 하였으나,
물건이 C 공장에 있는 상황인데 어떤 공장에서 출고 진행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래? C 공장에 있대?
야 근데 그걸 왜 네가 나한테 보고하냐?
순서가 잘못됐다. 네가 나한테 보고 할게 아니라
과장이 나한테 오는 게 맞는 것이다. 알겠냐?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고,
호통치는 이사의 큰 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일을 그렇게 하면 안 돼
과장이 나한테 와야지
네가 와서 왜 보고를 하냐?
어? 그런 식으로 하는 게 맞는 거냐?
나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제품 출고지를 알아야 물건을 픽업할 컨테이너를 올바른 공장에 배차하고 이사님이 지시한 출고지에서 진행하지 못하니까 정확한 출고 장소를 정하기 위해서 물어본 건데 내가 물어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사 입장에서는
나 -> 과장 -> 이사 순서로 보고가 돼야 하는데
나 -> 이사 순서로 보고가 되었고
이사 -> 과장 역순으로 상황을 확인해야 되는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내가 보고를 안 하고 넘어가서 출고하는 공장이 정해지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물어봤다.
또 과장이 이사님한테 확인한다는 말이 없어서
업무 담당자인 내가 확인해야겠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출고지의 분명성을 물어봤다.
그런데 그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혼난 것이 창피했고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저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를 말하며 눈물을 참았다.
네가 박정환(무능력한 부장의 가명)이야?
왜 일을 그런 식으로 해? 보고하는 순서도 몰라?
라며 나의 무능력한 부장 이름을 들먹이면서 나와 부장을 같은 취급 했다.
나는 모르는 내용을 부장의 지시대로 진행했는데,
왜 그렇게 진행하냐며 너네 부장이 그렇게 하라고 했냐며 나를 혼내는 이사가 증오스러웠다.
왜 나는 회사에서 무시당하고 무능력한 부장을 만나게 됐는지, 왜 우리 부장은 회사에서 파워가 없는지 억울했다. 낙하산으로 입사해도 회사에서 능력을 보여주고 회사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부장을 원하는 건 나의 사치일까?
나의 부장은 내가 면접 때 본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이 참 좋아 보였다. 그런데 회사에 입사해서 같이 일하고 지켜보니까 나의 부장은 우유부단하고 힘없는 그저 일 못하는 사람이었다.
팀원들이 담당하는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부장으로 지도해 줘야 하는 부분은 없는지,
팀원의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 고민하는 부장이 아니다.
그저 결재판에 도장을 찍고, 책임 질 일이 생기면 뒤로 숨어 버려 책임을 회피하고, 팀원이 타 팀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그저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는 부장이다. 팀의 우두머리로써 강력하게 의견을 제시해 줘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물쭈물거리기만 한다.
내가 회사에서 다른 상사한테 혼날 때,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기보다는 내 뒤에 숨어서 모든 책임과 무거움을 나 혼자 감당하게 하는 부장이 너무 싫었다.
내가 타 부서 상사한테 혼나기 전에 우리 팀 부장이 나한테 먼저 이것은 확인하고 결재받으러 가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저 부장이 미워서 너무 미워서 부장의 존재를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