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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부 Dec 07. 2023

억압된 본능, 섹스

죽기 전에 풋풋한 처녀와의 뜨거운 밤을 나에게 선사하고 싶어

영화 포스터 (출처: 구글 이미지)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아마도 제 소설에 이런 제목을 사용했다면, 무명의 작가가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제목을 붙였다는 오해를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이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작가였습니다.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백년 동안의 고독>의 저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는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20세기 중반의 남미와 세계 문학사를 대표하는 대문호이자 저널리스트, 정치운동가입니다.  특히 그는 남미의 역사, 토착신화, 마술, 미신, 민담 등을 소설의 주요 모티브로 삼으며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은 작가의 나이 77세인 2004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발행 60일만에 1백만 부를 돌파하고, 전세계 19개 언어로 번역된 화제작입니다.


제목처럼 등장인물의 설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영화는 아흔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유명한 컬럼니스트인 주인공 엘사비오가 과거에 자신이 드나들던 사창가의 포주에게 20년만에 전화를 걸면서 시작됩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요." 

"그날이라니요?" 

"내일이면 아흔이네, 죽기 전에 풋풋한 처녀와 뜨거운 밤을 나에게 선사하고 싶어." 


주인공은 90세 노인으로,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는데, 그 선물은 처녀와의 하룻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서깊은 사창가의 포주에게 부탁하여 소개받은 여성은 14살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렇게 아흔 번째 생일을 맞게 된 그는 어린 소녀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작가는 이 소설의 모티프인 노인과 소녀의 사랑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의 집>에서, 소설 속 주인공이 어린 소녀와의 첫날밤에 잠들어 있는 소녀를 깨우지 않고 하염없이 쳐다보는 장면은 1982년 비행기 안에서 잠들어 있는 여인을 7시간 동안 지켜본 경험에서 소설적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시청이 가능합니다.  다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화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젖가슴과 음모가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고 상영되므로, 이런 장면이 아직 부담스러운 분들은 영화보다는 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영화는 책의 내용을 상당히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존재함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영화와 책과 관련되어서는 수많은 평론가와 비평가가 제나름대로의 이론을 펼치고 있으니 굳이 제가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저는 기존의 평론과는 조금 다르게 느낀 부분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영화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느 노인이 한평생 나눈 섹스와 관련된 기억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하는 창녀와의 '섹스'에만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불현듯 내뱉은 '감추고 싶을 때는 반대로 행동한다'는 말처럼,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 없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싶었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소녀를 처음 만나는 영화 속 장면 캡쳐 (출처: 구글 이미지)

지금은 지역의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된 주인공 엘사비오는 아흔 살의 생일에 스스로에게 선물한, 함께 밤을 보낼 14살의 소녀를 바라보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아직 모릅니다. 결국 소녀를 품에 안지 못하고 잠시 곁에서 눈을 붙이고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소설에서는 이 장면을 '소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아을 때의 모습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고 묘사하며 그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모든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침대 모서리에 앉아 그녀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열대 지방 출신임을 드러내듯이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따스했다. 그녀는 깨끗하게 씻기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음부에 돋아나기 시작한 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슴은 아직 사내아이의 것처럼 밋밋했지만, 터지기 일보 직전의 은밀한 힘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믿음이 깨지는 것이 두려워 무심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가정부 다미아나에게 합니다. 그러자 다미아나가 말합니다. "전 있어요. 당신 때문에 22년을 울었죠." 사실 그는 22년 전 다미아나가 빨래하는 모습에 욕정을 느껴 항문성교를 시도하였고 지금까지 매달 그녀와 똑같은 체위로 관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마디 더 남깁니다. "덕분에 난 아직도 처녀지요."  하지만 그렇게 욕정 뿐이었던 관계에서도 다미아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흔번 째 생일 날, 진정한 사랑을 즐기라며 침실에 꽃과 편지를 남깁니다. 그때서야 엘 사비오는 사랑이 어떤 마음인지,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느끼며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는 그동안의 비판적이고 이성적이던 정치 칼럼을 끝내고 감성의 연애 칼럼을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 장면은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기자가 되었던 그가, 기자에서 철학자로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빨래하는 다미아나의 모습 (영화 속 한 장면, 출처: 구글 이미지)

누군가는 이 영화가 육체적 사랑에 빠졌던 늙은 노인이 뒤늦게 정신적 사랑을 찾는 이야기라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았습니다. 엘사비오는 처음부터 정신적 사랑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성녀와의 사랑을 꿈꾸었습니다. 그에게 성적환희를 즐기는 여자는 모두 창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14살 소녀는 어머니를 대신할 성녀였습니다. 그는 한평생을 어머니와 같은 성녀와의 정신적 사랑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돈이 없어 보석을 팔고 가짜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으로, 어머니도 그저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임을 깨닫게 되는 엘사비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엘사비오는 육체적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남성이었습니다. 그에게 '섹스'는 욕정을 해소하는 행위에 불과하기에 돈을 지불하고 창녀를 만나거나 가정부의 엉덩이에 '삽입'만 했던 남성이었습니다. 하지만 14살 소녀의 잠들어 있는 육체를 바라보다 낯선 감정을 느끼고, 가정부 다미아나를 통해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젊은 시절 그를 사랑했던 창녀 카실다와 40년만에 재회하며 사랑은 '삽입'이 아니라 사랑의 감각을 몸이 느끼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몸은 늙어가니 사랑을 미루지 말라는 카실다의 말에 용기를 얻어 소녀를 다시 만납니다.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사랑을 떠올릴 때 몸보다 마음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아마 도덕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철학자 니체도 몸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몸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몸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 몸은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다."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정, 관념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몸의 행위를 도덕이란 관념으로 억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카테고리의 이름을 '억압된 본능, 섹스'라고 지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몸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입니다. 몸은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도덕으로 규범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도덕으로 규범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허락된 행위에는 정상이란 단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남녀의 체위도 '정상위'란 프레임을 씌우는 순간, 원치않는 성녀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먼저 섹스를 한 후에 사귈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선섹후사'나 클럽에서 만난 낯선 이와의 '원나잇'을 즐기라는 건 아닙니다. 500명이 넘는 창녀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엘사비오가 사랑을 찾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 가벼운 관계는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모두 가짜입니다. 


몸의 감각을 제대로 느끼려 하지 않고 단순한 관계로 의한 오르가즘은 마약에 불과합니다. 원나잇에서도 애무를 통해 몸의 감각을 느끼면 되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몸의 감각은 그런 표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단발성 쾌락은 내성만 생겨 더 강한 자극을 원할게 될 뿐입니다. 어쩌면 발기조차 안될지 모르는 아흔의 노인과의 밤을 기다린 건, 돈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이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사랑'으로 연결된 '섹스'가 여성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창가의 포주 로사 카바르카스입니다. 이미 그녀가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영화는 주인공 엘사비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되니까요.

사창가 포주 역할의 제랄딘 채플린 (출처: 구글 이미지)

지금부터는 캐스팅과 관련되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사창가 포주역의 배우 이름은 '제랄딘 채플린'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몇몇 독자분은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딸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연애사를 떠올리면, 아마도 영화감독이 제랄딘 채플린을 일부러 캐스팅한 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어린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듯이, 찰리 채플린은 어린 여성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찰리 채플린은 총 네 번의 결혼식을 올리는데  세번째 부인만 결혼 당시 20대 여성이었고, 다른 세 명은 모두 10대였습입니다. 첫 번째와 두번째 아내는 16살에, 그리고 마지막이자 네번째 아내는 18살에 찰리 채플린과 결혼합니다. 마지막 아내인 '우나 오닐'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배우 '제랄딘 채플린'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앞선 세번의 결혼은 길어야 4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여성을 좋아하던 찰리 채플린은 마치 엘사비오가 창녀를 찾듯이 끊임없이 연애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다 영화처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18살의 '우나 오닐'이었습니다.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찰리 채플린의 나이는 54세로 그녀보다 36살이 많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장인보다는 한 살이 어렸다고 하네요.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 '우나 오닐'은 결국 아버지와 의절을 하고서야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엘사비오가 사랑에 빠졌다고 외치자 저 멀리서 미쳤다고 누군가 외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찰리 채플린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54세의 나이에 진정한 사랑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찰리 채플린이 사망할 때까지 여덟명의 자녀를 낳으며 35년간을 함께합니다. 


그들의 러브스토리에 숨은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우나 오닐'은 결혼 전에 작가지망생인 군인과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훗날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대작가가 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반대할 만하겠죠. 게다가 우나 오닐의 아버지는 미국 현대연극의 아버지, 드라마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4번의 퓰리처상과 193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진 오닐'입니다. 혹자는 딸이 나이든 찰리 채플린을 사랑하게 된 이유로 아버지 '유진 오닐'을 지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유진 오닐은 평소 딸에게 무관심하여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했고, 그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 나이든 찰리 채플린을 사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우측부터 샐린저, 채플린, 우나 오닐, 유진 오닐 (출처: 민음사)

또 다른 캐스팅의 비화도 있습니다. 창녀 카실다는 젊은 시절의 엘사비오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받지 않고도 관계를 할 수 있다며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엘사비오는 끝내 거절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무서워 도망치게 되고, 이렇게 두사람은 자연스러운 이별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가 사라진 14살 소녀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재회하게 되는데, 젊은 시절의 카실다 역을 맡은 배우(올리비아 몰리나)는 노년의 카실다 역을 맡은 배우(안젤라 몰리나)의 딸입니다. 실제 모녀가 연대기에 맞춰 한 인물을 연기하였기에 특별한 분장없이도 한결 자연스럽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카실다 (화면 캡쳐, 출처: 구글 이미지)
40년만에 다시 만난 카실다(화면 캡쳐, 출처: 구글 이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두이노의 비가'의 구절들이 떠오릅니다.

(.......)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내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이제 그만>,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우리들 인간의 존재를, 나는 알고 있다.

너희들이 그처럼 행복하게 서로를 어루만지는 것은, 애무가 시간을 멈추기 때문이다.

(.......)

살며시 어루만지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임을.

(......) 

                                                                                                                       - 제2비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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