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0년마다 오는 변화 속에서 배우는 인생의 태도
2025년 많은 사건사고를 겪었지만 가장 큰 사건은 회사의 사업종료에 따른 조기은퇴라는 인생의 큰 변화였다. 그리고 10년마다 큰 변화를 겪으며 아홉수 교운기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2025년은 만 39세가 되는 해였다. 19세였던 2005년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투병 속에서 개인적인 어려움도 겹친 인생의 열등감을 가장 쓰라리게 느낀 때였다. 29세였던 2015년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이벤트들이 한 해 동안 휘몰아치며 정신적으로 피폐한 때였다. 처음엔 저주처럼 10년에 한 번씩 시련을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곱씹어 보니 큰 변화 속에 성장하여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인생의 분기점의 역할을 해줬다. 19세, 29세를 지나 또 한 번 강산이 바뀌어 39세가 됐을 때, 그전 나이 때와는 다르게 시련을 바라보는 관점이 새롭게 발전하여 나쁜 일 속에서 좋은 것을 찾고자 노력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아홉수마다 겪었던 시련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해 본다.
만 19세가 되고 처음 대학교에 가서 알았다. 세상은 지금껏 살아온 작은 우물과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들려주는 막연한 미래들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어디서도 앞으로의 모습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는 어른 없이, 그저 오늘 하루 가장 편한 것만 찾아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초입,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 입원하여 병시중을 들었을 때도, 육체적으로 고된 환경 속 정신적 편안함을 찾아 막연히 도망쳤다. 아무것도 몰라서 오히려 버겁지 않았다.
개학에 맞춰 몸이 불편했던 아버지를 집으로 모신 후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녀온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보냈다. 원래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던 집돌이였다. 새벽같이 나가 밤늦게까지 술만 마시다 걱정만 끼치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면 줄담배를 피워 머리만 아프게 하던 사람이, 집에 꼼짝없이 누워 있으니 차라리 다른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병간호로 공부를 덜 해도 된다는 핑곗거리가 생겨 좋았다. 이 시기 가장 좋아하던 독서를 원 없이해서 좋았다.
원래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던 공부를 조금 덜 끄적거리고, 아무 생각 없이 수능을 봤다. 아버지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는 것은 핑계였다. 그냥 그때의 나는 그대로 나였다. 거기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무도 관심 없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성적표를 앞에 두고 가장 편한 것을 선택한 나약한 존재였다. 그렇게 입학등록금이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에 갔다. 수시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수능점수에 맞춰 가장 취업이 잘 된다는 과를 골라 정시로 서울 소재의 4년제 대학교 경영학과를 갔다.
대학을 가서 처음 알게 되었다. 자신이 달고 있는 이름표가 사회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학교를 가는 길에 갈림길이 있었다. 지하철을 환승하는데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길이 갈렸다. 갈아타는 지하철 왼쪽은 명문대, 오른쪽은 내가 다니던 학교의 노선이다. 학교과잠을 입고 등교를 서두르는 명문대 학생들 반대편에 아무 생각 없이 편한 옷을 입고 길을 걷던 나를 문득 발견한다. 그들을 지켜보며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생겼고, 그 감정이 열등감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열등감에 굴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열등감을 극복할 것이다. 우선 감정이 들자 선택을 해야 했다. 당시 겁 없이 극복하자는 선택을 한 것은 평생의 잘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집안의 사정, 부모의 상황을 모두 내팽개치고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휴학 후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9세 때 처음으로 목표를 가지고 '노력'이라는 것을 했다. '노력'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건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에 만족할 만큼 정말 하얗게 불태워 봤기 때문이다. 후유증으로 기흉이라는 병을 얻어 반수에 실패하고 수술까지 하게 됐지만 삶의 태도를 궁극적으로 바꿔놓은 첫 번째 변화였다. 그때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이해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배웠다.
그 후로 29세 때까지는 19세 때 생긴 불굴의 의지를 통해서 못할 것이 없는 시기였다. 혼자서 통제할 수 있는 공부가 가장 쉬웠고, 다중적으로 인간관계가 얽혀있는 사회생활부터 만에 하나 잘못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투자금 운용까지 강한 의지와 천운으로 모든 것이 술술 풀렸다.
그때 나를 주저앉힌 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였다. 10년을 집에서 앓던 아버지가 요양원에 모신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돈을 벌면서 어머니를 편하게 해 주려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옮겼는데 일주일을 못 버티고 돌아가셨다. 안타까운 건 월요일에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고 금요일 퇴근 후에 병문안을 가려고 했는데, 금요일 오전에 회사에서 급하게 전화를 받고 알게 되어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무엇하나 통제하지 못한 시련이었다.
아버지가 투병한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지 못하는 시기에 살았다. 제대로 해준 것이 없는 게 후회가 됐다. 돌아가신 후 근처에 가장 좋은 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잡았다. 첫 번째로 큰 특실에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들에게 제일 비싼 음식을 대접했다. 그동안 집안에서 지내느라 답답했을 아버지를 위해 양지바른 지역의 가족묘 수목장지에 모셨다. 살아생전 그토록 원망했건만... 뭐라도 해주고 싶은 후회라는 감정을 마주했다.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며 그해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2015년은 결혼식이 있던 때였다. 선택을 해야 했고 그해 결혼을 감행했다. 두 사건사이 6개월 이상의 간격도 있었고,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되실지 모르는 시간을 무려 10년을 살며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슬퍼만 하기엔 긴 시간이었다. 아버지에겐 며느리를 선물하는 자리였다. 아쉽게도 결혼식장에 아버지의 자리는 삼촌이 대신했지만...
결혼은 인생에 가장 큰 희극 중 하나로 남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아내와 행복한 일상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도 안 돼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늘이 무너졌다. 앞에 10년은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 뒤에 10년은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 또 다음 10년은 남편 병시중에 고생이었다. 좋은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때, 갑자기 시련이 찾아온다.
아직은 아니었다. 그동안 감당했던 시련에 대한 보상이 과연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설득으로도 타협하기엔 시련에 대한 보상의 등가가 맞지 않았다. 절대 지금은 아니었다. 고통만 남기고 간 아버지는 후회라는 감정을 추스르며 미련만 남긴 채 보낼 수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고생만 하던 어머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살려야 했다.
지금 막 결혼을 한 아내에겐 미안했지만 어머니를 서울대병원에 모시고 수술을 마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천운으로 초기에 발견한 암덩어리를 다행히 깨끗하게 떼어내고, 춘천에 위치한 가장 좋다는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매주 어머니를 아내와 함께 찾아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고 좋은 주제의 이야기만 나누며 믿을 수 없는 기쁨을 만끽했다. 6개월 정도 요양병원에서 간호를 받던 어머니는 건강히 집으로 돌아오고 결국 5년이 지나 완치판정을 받아낸다.
지금도 아내와 함께 가던 주말의 춘천 가는 길이 떠오른다. 가장 슬픈 상황에서 달리던 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가 완치판정을 받은 지금에 와서 얼마나 행복했던 추억이었는지... 추운 겨울이었지만 꽁꽁 언 눈길을 달리면서도 결혼한 지 얼마안 된 아내와 데이트도 하고 또 어머니를 건강히 볼 생각에 설레던 길이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듯 건강해진 어머니가 새싹처럼 다시 돌아온 행복한 경험이었다.
19살에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수능에 실패하고, 기흉이 양쪽으로 터져 큰 수술까지 받았던 와중에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혼을 하고, 어머니의 암수술을 겪으며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감사함을 배운다. 안 되는 건 어떻게 해도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늘 겸손하고 감사하며, 어쩔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배웠다. 2015년 세 가지 큰 사건 속에서 인생의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후로 다음 39세까지는 불굴의 의지와 겸손한 자세를 통해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열심히 하는 것들이 차례로 잘 되었고, 운영하는 자산은 커진 규모만큼이나 안정적인 구조로 겸손하게 전환하여 위험이 오더라도 모든 것을 잃지 않도록 재설계했다. 돈을 버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흘려보내며 살았다.
이직을 한 회사가 풍향을 잘 만났을 때는 그토록 승승장구하다가 방향이 바뀌며 고꾸라진다. 불굴의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철저히 몸으로 버티며 3년의 시간을 보내고 결국 39세가 된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일해주는 직원들을 책임질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소용돌이 한가운데 빠져서 허우적 대다 시간만 허비했다. 결국은 무엇하나 뜻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상황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대로 회사를 정리하고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고 여러 사건을 겪으며 의연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새롭게 닥친 시련에 나약한 인간으로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살 궁리를 마련해 놓고 직원들을 챙긴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다른 회사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의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오히려 고맙다는 직원들에게 더욱 감정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회사생활을 마무리했다.
더 버텨봤자 결과는 똑같다. 후회는 없다. 지금의 상황에 감사하며 다시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이번 인생의 세 번째 큰 변화가 결코 좌절이나 끝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결과에 마냥 감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각으로 보라보는 여유를 갖자고 생각했다. 강박을 내려놓고 시선을 돌리자 오히려 더 좋은 미래가 보인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매 10년마다 한 번씩 큰 위기가 찾아온다.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도 배웠고, 겸손과 감사도 배웠고, 또 시련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도 배웠다. 정신없이 달려왔던 20년간 몸도 정신도 많이 지쳐있다. 이번 기회에 휴식이 주어지고,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며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한다.
살다 보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언젠가 있을 끝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10년마다 겪었던 변화 속에서 배웠던 것들을 잊지 않고 믿고 버텨나가면 다시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렇게 세 번째 전환점 앞에서 다시 한번 세상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