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어머니의 독립을 위해 전략을 짜다.
29세가 된 3월 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신다. 그해 10월 결혼을 한다. 본래 어머니, 나, 남동생 그리고 아버지 4인 가족은 이 해에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 내 인생 속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15년은 방탕하셨고, 그다음 14년은 아프셨다. 어머니와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는 늘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침부터 새벽까지 술만 마셨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남은 세명의 가족은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해 이들 사이엔 정의 내리기 힘든 전우애가 생긴다. 그 전우애는 전시에는 강한 생존력이지만 평화의 시기에는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모호성을 낳는다. 힘든 시기를 같이 겪으며 그렇게 서로에게 의존적인 관계가 고착되어 간다.
다세대 주택을 팔아 마련한 자본으로 지금 생각해도 천운으로 기가 막히게 아파트를 매입하여 이사 갔다. 한 번 어느 방면에서 돈을 벌면 계속 생각이 성공을 경험한 쪽으로 미치기 마련인데, 너무 어린 나이에 거친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건축사업에 질려 있었다. 대기업 건설회사와는 다르게 소규모 주택 개발 사업에 있어,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무례한 경우가 많았다. 다세대 8채로 이뤄진 건물을 신축해서 1년 만에 전부 매각한 후 미련 없이 시장을 떠난다.
매각자금으로 서울 시내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당시 대학교 편입에 성공하여 목표로 하던 학교에서 공부하던 중에 또 한 번 부족함을 느낀다. 취업을 하려면 필요한 자격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쏟아져 나온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었지만 우선 해외연수 경험이 중요한 것을 알고 호주에 위치한 국내 대기업 해외지사 사무실의 인턴자리에 우여곡절 끝에 합격하여 시드니에서 일하게 되었다.
호주로 건너가고 얼마 안 되어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온다. 신축 후 마지막에 거주하고 있던 다세대주택이 팔렸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비거주주택을 전부 매각하고 거주주택만 팔리면 진행할 다음 스텝까지 기획해 놓았다. 호주에 있어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 바로 거주주택까지 팔리며 다세대 주택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사전에 염두에 두었던 3군데의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우선 어머니와 의견을 맞추기 위해 어머니에게 우리가 이사 갈 만한 아파트를 먼저 찾아보길 권한다.
당시 부동산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렸을 적부터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이었다. 다가구 주택에 살며 다녔던 고등학교가 아파트 단지에 파묻힌 버스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 있었다. 거기서 같이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대기업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자녀였다. 그들이 하는 고민의 유형이 늘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나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종의 경외심이 생겼다. 부동산 공부를 통해 공식처럼 아파트 분석을 하진 못했어도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한 동네에 20년을 넘게 거주하며 알게 된 입지에 대한 평가가 내 머릿속에 지도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아파트를 찾아서 같이 보자고 한 것은 이미 판단한 입지분석 외에 실제 살림을 하는 어머니의 편안한 생활을 맞춰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어머니가 찾은 아파트는 정말 지금 다시 분석해도 절대 선택하지 말아야 할 조건에 100%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때 어머니가 위대한 똥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제안한 아파트는 큰 전통시장 맞은편에 위치한 한 동짜리 나 홀로 아파트였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부 인테리어는 말끔했으나 입지와 상품성 측면에서 선택하면 안 됐다. 전통시장이 가까워 장보기 편하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전통상권이 집값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 홀로 아파트 근처에 초등학교가 없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격이 내가 찾아본 3개 단지 대비 결코 싸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축 프리미엄이었다. 해당 아파트는 지금도 처음 봤던 가격에서 큰 변화 없이 낡아가고 있다.
다음으로 제안한 아파트는 내가 조언한 조건에 맞춰 찾았다. 초대단지 옆에 단지를 같이 구성하는 중형단지의 초등학교를 가까이 끼고 있는 아파트였다. 확실히 첫 번째 아파트보다는 입지가 좋았지만 결국 옆에 대로변을 사이에 두고 동이 바뀌는 아파트지구와 비교하여 입지가 떨어졌다. 무엇보다 지하철역이 멀었다. 여기에 더 디테일하게 분석하면 학군에서 갈렸다. 행정동이 바뀌는 문제로 중학교 배정에 있어 전통적인 학업성취도가 높은 중학교 배치가 어려웠고, 학원밀집지역과도 거리가 있어 도보권이 아니었다. 가격 또한 비교적 준신축이어서 내가 찾은 3개 단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생활패턴에 맞춰 판단하다 보니 연세가 있는 분들의 기호시설이 근처에 있으며 내부는 비교적 새것을 고르는 쪽으로 결정하셨다. 가장 집값이 오르기 힘든 선택이었다. 아파트는 어린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세대의 선호기준에 맞춰 따라가면 수요가 제일 높아서 실패확률이 낮았다. 가장 구매력이 높은 시기의 맞벌이 부부가 편하게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 집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집적효과가 높았다. 당시에는 디테일하게 분석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해당 지역에서 초, 중, 고를 다니며 감으로 얻은 노하우였다.
도심권으로 가는 지하철역이 가깝고, 초등학교가 근처에 있으며, 아파트단지로 주변환경이 집적된 지역에서 좋은 중학교에 배정되는 가장 낡은 아파트들을 가격에 맞춰 찾았다. 금액을 조금만 올리면 훨씬 좋은 단지가 많았지만 돈을 깔고 사는 집에 전재산을 투입할 수 없어 적당히 타협하여 금액을 맞췄다.
하나는 34평 단일평수의 1,000세대 이상 대단지였고, 다른 하나는 맞은편에 한 동짜리 나 홀로지만 주변이 전부 대단지로 감싸진 아파트였다. 마지막으로 제안한 곳은 아래쪽 중형규모의 단지였다. 입지조건은 전부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있어 거의 비슷한 조건에 같은 행정동으로 초등학교 배정을 제외하고 중고등학군도 공유했다. 건축 연도는 전부 3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였다.
초등학교는 당시 살고 있던 행정구의 제일 낙후지역, 중학교는 어머니가 선택한 아파트들이 모여있는 동네, 고등학교는 내가 선택한 아파트들이 모여있는 동네에서 나왔다. 공교롭게도 행정구를 아우르는 다양한 입지의 학교를 다니며 지역별 평가가 자동으로 된 상태였다. 고등학교를 나왔던 동네가 가장 좋았고 이 중에 임장을 돌고 선택하도록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3개 단지를 다 돌고 부동산을 만난 후 브리핑을 해줬다. 1,000세대 이상으로 선택하고 싶었는데 가격대가 애매하게 위에 걸쳐 있어 망설여졌다. 다음으로 한 동짜리라도 대단지에 같이 묶여있는 아파트가 좋아 보였지만, 어머니가 이미 중형단지에 마음이 가 있었다. 여기는 제안한 3군데 중 입지가 가장 밀리고 평수가 다양해 추후 권리관계 분석도 복잡한 아파트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매물로 나온 집 가운데 한 군데에 이미 마음이 꽂혔다. 맞은편 뷰가 숲인 게 마음에 들어 이곳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직접 임장을 못 가본 게 꺼림칙했지만, 어머니가 살림하기에 마음에 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당시 분석력이 좋지 못해서 몰랐던 사실들이 나중에 하나씩 나왔다. 우선 숲이 보이는 건 좋지만 동향이었다. 산 맞은 편의 동향이어서 햇빛이 드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그때 기억이 났다. 어머니는 밝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서도 불을 거의 켜지 않고 사신다. 두 번째로는 30평대 아파트였는데 대지지분이 같은 단지 20평대 후반 아파트보다 작았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당시 지분을 나눌 때 구역상 불가피하게 현재처럼 나눠진 것 같았다. 감정평가를 통해서 어느 정도 인정은 받겠지만 향후 재건축 시 다툼의 여지가 있는 불안정한 단지였다.
결국 골라도 제일 난해한 것을 골랐다. 역시 어머니가 똥손임을 증명한다. [이후로도 여러 선택의 갈레에서 어머니 선택의 반대로만 하면 돈을 벌었다.] 물론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 가치는 앞서 돌아본 2개 단지보다 훨씬 입지가 좋아 자산가치로는 손색이 없었다. 그렇게 마련한 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산다. 그리고 이때 예산에 맞춘 아파트를 매입하고 남겨 둔 돈으로 호주에서 어머니 노후 생활비를 위해 임대할 만한 아파트를 열심히 찾아 투자용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월세로 마련했다. 다세대 건물을 신축해 매각한 자금으로 자산가치가 높은 아파트와 현금흐름을 일으키는 임대용 주택 2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1년간의 호주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남은 시간 쉬지 않고 준비하여 대기업에 들어간다. 입사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그리고 바로 결혼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이 시간 가족이 모두 큰 변화를 겪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큰집에 혼자 살기 싫으시다고 이사를 원했다. 동생도 베트남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어 어머니는 혼자였다.
어머니가 암수술을 마치고, 요양병원에서 돌아온 시점에 맞춰 가족이 모여 살던 아파트를 팔아 작은 아파트 두 채를 샀다. 하나는 아버지 사후 동생몫으로 장만했고, 남은 하나는 어머니 노후를 위해 투자용으로 마련했다. 이때는 부동산 시장상황이 좋아 어머니 암수술 후 보험회사에서 나온 암진단비로 발품을 팔아 다른 지역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더 장만한다. 어머니가 완치되고 건강을 찾으며 진단금이 흐지부지 소비에 사용되는 것보다 자신을 위한 자산으로 남을 수 있도록 투자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어머니의 노후와 독립준비를 마쳤다.
그동안 너무도 어렸던 두 아들과 역할을 하지 못한 아픈 남편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진 인생에 대한 보상이다. 다세대 주택을 지으며 한 번 점프했고, 그 자원 전부를 아파트에 집중투자하여 두 번 점프하며 어머니의 경제적 상황은 나아졌다. 할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만든 경제적 이득은 전부 어머니에게 전달하고 나와 동생은 최소한의 지원 외에 경제적 이득을 취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어머니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제 각자가 독립해서 살아가면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전쟁상태가 지속되며 원가족의 굴레는 생각보다 칡뿌리처럼 강하게 엮여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 생활에 선을 정해주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동안 굉장히 못되게 굴었다. 모자간의 남길 정만 남기고 전부 끊어냈다. 이 당시 어머니는 정을 끊으려고 일부로 그러냐는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지만 기준이 없으면 어떤 관계든 무너진다. 초기에 선을 분명히 하여 적응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키기 위해 버리는 시간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갈등이 발생하고 서로 간의 서운함도 생긴다. 하지만 기준이 분명하면 초기에 문제가 곯지 않도록 관리하며 통제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의 양육을 시어머니가 봐주는 가정 중 현명하게 이 상황을 극복한 집을 주변에서 많이 보지 못했다. 새로운 가정이 생기면 원가족은 반드시 서열상 아래에 위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문제 해결이 쉬워진다. 그 기준을 내세우는 쪽도 어렵고 받아들이는 쪽도 힘들지만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건강한 가족의 역할이 다시 정의된다.
그 힘든 과정을 거치고 인정했던 보상은 지금도 보고 싶은 아들들과 손자를 10분 거리 안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관계로 주어졌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성숙해지면서 건강한 관계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 서운한 게 있으면 바로 이야기하고 듣는 쪽은 잘 경청해서 당시의 입장을 잘 설명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로부터 독립을 한다.
그렇게 어머니가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