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동생의 독립을 위한 전략을 짜다.
아버지가 아프시고 다가구 주택을 지어 분양하며 현금이 생겼다. 집의 경영권을 쥐고 있던 입장에서 욕심을 내고자 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개발이익을 얻은 것이 결과적으로 경영상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그 이익자체에 대한 소유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 소유권은 엄연히 부모님께 있었고 잠시 통제하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철학을 기준으로 일을 수행했다.
다세대 주택을 분양한 후 매각대금으로 아파트를 매입했다. 명의는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 명의로 나누어 세법적으로 가장 이익이 되도록 배분했다. 이후로도 부모가 보유한 자산에서 파생되는 부는 철저히 둘에게 집중되도록 설계했다. 최고의사결정자가 공정하지 못하면 의심이 싹트고 조직자체가 무너진다. 돈이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돈으로 얻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손해 보듯 양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
독립할 시기가 다가오며 최소한의 자립을 목적으로 한 금액을 기준으로 삼아 지원을 받았다. 당시 1억 원 이하를 원칙으로 나와 동생 비슷한 규모의 금액으로 지원액수를 확정했다. 내가 먼저 독립했고, 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거주하고 있던 주택을 팔아 동생 몫과 어머니 몫으로 나눠 배분했다. 당시 어머니의 상황에서 두 아들에 대한 지원 이후로도 대부분의 자산을 소유하는 형태여야 했고 1억 원 이하면 독립에 충분했다.
자녀가 독립할 때 지원금액은 각 가정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가정은 1억 원 정도는 결혼할 때 당연하게 부담 없이 줄 수 있는 돈이고, 어떤 가정은 오히려 부모가 지원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과 이하로 한도 없이 제각각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각 가정의 상황에 따라 기준은 다르겠지만 우리의 경우엔 부모가 대부분의 부를 보유하면서 가장 최소한으로 도움받을 수 있는 금액이 1억 원 이하였다.
독립을 시작하며 기존에 관리하던 재무제표도 철저히 나누었다. 재무제표가 섞여 있으면 결국 자산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재무제표 하나로 관리되던 가계는 내가 취업하고 8,000만 원을 분배받아 집을 매입한 이후 어머니와 나 두 가계에 대한 재무제표로 나누어졌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그의 몫으로 1억 원을 분배받으며 동생가계를 완전히 독립시켰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세 가계는 철저히 공정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며 운영되고 있다.
독립을 했다고 해서 관리를 놓은 것은 아니다. 재무제표를 분리하여 어머니와 내 것을 동시에 작성하며 관리했다. 동생 또한 단순히 1억 원을 현금지원한 것이 아니라 자산을 매입하여 부가 확장되게끔 시스템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명의의 거주주택을 팔아 현금을 만들었다. 당시 나는 이미 독립한 상황에서 해당 수익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우선 전부 어머니의 자산이었고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동생은 물가상승률에 비례하여 내가 지원받은 금액과 비슷한 금액을 배분하기로 했다. 그렇게 1억 원으로 거주하고 있던 단지 바로 옆단지에 매물로 나온 18평짜리 소형아파트를 동생명의로 매입했다. 현금 1억 원이 들었고 나머지는 전세보증금으로 해결했다. 이외 남은 금액으로는 어머니 명의의 아파트를 매입했다.
당시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거의 끝나고 아파트 가격과 전세금이 동시에 조금씩 오르던 호황기에 진입시기로 수년간 아파트가격이 하락하는 것을 목도한 어머니가 조금 더 기다렸다 사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아파트를 팔았다면 반드시 한 채는 곧바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소신으로 가지고 있던 내가 매입을 강행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파트를 팔아 아파트를 매입하여 가격이 떨어지면 어차피 상황이 본전이지만 혹시라도 오르면 다시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의 포모가 온다. 일단 심리가 흔들리면 엉뚱한 선택을 할 확률이 올라간다. 주택 한 채는 무조건 들고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과 통계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때의 확률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동생명의의 아파트를 매입하면서 매도자 측과 지루한 심리전이 이어졌다. 집을 파는 사람들은 아들 명의로 집을 사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당시에 집을 파는 것을 아까워했으나 아들이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며 집이 좁아서 더는 못살겠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집을 파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계속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값을 깎으려 드는 아들 또래의 젊은 놈이 꼴배기 싫었나 보다. 협상을 해볼 겸 집상태를 핑계 삼아 500만 원을 깎자고 하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안 팔아" 외치고는 집을 안 판다고 하고 그대로 나가버린다. 다행히 할머니가 붙잡고 돌아와 겨우겨우 자리에 앉혔다. 그다음부터는 공손한 자세로 판다는 가격에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당시 층수도 중간층에 남향으로 여러모로 마음에 들고 가격도 시장에 나온 가격 중 가장 싸게 나온 집이었다. 수리를 한지 꽤 오래되어 낡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지만 새시가 교체된 상태여서 큰돈이 들어갈 인테리어는 별로 없었다. 매도자가 정말 아쉬워하는 걸로 봐서 역시 후회 없는 선택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어머니가 반대하던 아파트 매입을 강행했다.
매입과 동시에 아파트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어머니가 똥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어머니는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는다. 그 한 번의 선택으로 동생은 안정적인 주택을 한채 소유하게 되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자산의 소유여부로 삶의 질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양극화 시대에 어머니의 말대로 그때 아파트를 사지 않았다면 동생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철저히 동생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며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영향의 기준이 있다. 호의는 상대가 원할 때 호의인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참견이라는 것이다. 동생이 준비가 되지 않고 도움을 청할 때는 철저하게 영향을 끼치며 지원하지만 그가 독립할 때가 되었을 때는 실수할 것을 알면서도 그저 지켜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하나씩 그에 대한 영향력을 내려놓았다.
물론 답을 안다고 생각한 입장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금 더 빠른 길이 보이고 확실히 옳은 길이 보이는데도 그 선택을 하지 않는 동생을 볼 때면 가끔씩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 선택을 존중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믿고 기다려 주는 것이 진정으로 그가 독립할 수 있는 길임을 알기에 그저 묵묵히 응원해 주고 있다.
동생의 독립을 위한 절차는 최대한 진행하면서도 혼자 성장해야 하는 일에 대해선 어떠한 지원 없이 믿고 기다려 주기로 했다. 동생이 염원하던 교환학생에 합격하여 베트남으로 떠났다. 처음 도전했다 떨어진 경험을 토대로 합격확률을 최대한 높이는 전략을 세워 적극 추천했는데 동생이 합격을 한 것이다. 영어회화가 부족하다는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미국만 고집하다 떨어진 내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동생에게는 물가가 저렴하지만 수업은 영어로 진행하는 개발도상국에 지원하도록 조언했던 것이 적중했다.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동남아 국가 중 경제성장률이 높고 제조업 투자가 집중된 국가의 경험은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고 판단했다.
동생이 떠나고 동생에 대한 지원을 철저하게 최소한으로 줄여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만 지급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마련하도록 독려했고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생존을 위해 동생은 친한 친구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서 위급할 때마다 넉살 좋게 돈을 융통했고, 베트남의 대기업에 인턴으로 합격하여 교환학생 종료 후 추가로 체류할 수 있는 생활비와 대기업 인턴 경험도 스펙으로 쌓을 수 있는 기회도 잡았다. 결국 극한 상황이 사람을 단련시킨다.
이런 단련은 동생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들이 절대 하지 못할 선택을 쉽게 내리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내와 결혼하면서부터이다. 결혼을 앞두던 때 동생은 여전히 베트남에서 교환학생신분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어머니와 나는 당연히 동생을 결혼식에 부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축의금도 내지 않을뿐더러 오고 가는 비용을 부담할 이유가 없었다. 동생이 오는 것에 대한 경제적 효용이 없었다. 동생도 처음엔 황당해했지만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다만 동생을 결혼식에 부르지 않았다는 소식에 아내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 같다. 결국 결혼사진에 동생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내의 친구들은 모두 내가 외아들인지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결정에 대해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내를 만나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해 가며 조금씩 그동안 내가 가진 철학들이 좀 독특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다.
타지에서 철저히 단련된 동생은 돌아온 후로도 형이 밟았던 전철을 밟으며 강하게 성장했고, 처음에는 만족스러운 곳에 취업하지 못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결국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게 된다. 취업해서 고연봉을 받으며 더욱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월급만으로는 평범한 삶을 사는 것조차 버겁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평범하지 않은 집안에서 함께 고생한 대가로 이미 자산을 만들어 두었고 마찬가지로 극한의 절약을 기반으로 한 생활습관이 시너지를 만들어 좋은 아내를 얻어 행복한 가정을 일굴 수 있었다.
그렇게 독립한 동생에 대해선 더 이상 여느 형제와 다름없는 정도의 관심만 가지고 파악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은 응원해 주는 것으로 관계를 수정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을 다시 한번 실행한 것이다. 그동안 감정이입해서 도와주었던 노력을 나와 동일시하는 순간 관계는 파국으로 간다. 처음부터 목적이 동생의 건강한 독립이었고, 목적이 달성된 시점에 그동안 쏟아부었던 관심과 노력은 매몰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 절대 들어간 비용에 대가로 상대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려고 하면 결국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동생의 마음에 안 드는 모든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면서 형제는 지금 어느 때보다 돈독한 우애를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그르다고 생각했던 모든 결정이 동생이 살아가면서 사실은 옳은 결정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때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 그냥 잘 살아주기만 바랄 뿐이다. 동생과의 관계를 아들에서 친구로 재정의하면서 어깨의 무거운 돌도 하나 내려놓았다. 새롭게 만들어진 가정에 충실하며 가장 좋은 친구를 얻게 된 것에 만족한다.
그렇게 동생이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