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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 데이비드 소라 Jan 26. 2022

나도    언니가 있었으면

대구 제로 웨이스트 샵 '제로 스테이' 방문기

나는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친구가 가진 값지고 빛나는 물건들, 예를 들면 HOT 오빠들의 신상 브로마이드, 대구 시내 지하상가 레코드 샵에 서둘러 가야 살 수 있었던 SES의 일본 앨범들, 그리고 그 당시 충전하면서도 들을 수 있는 거치형 cd플레이어들은 다 친구들이 언니, 오빠 몰래 가져와 내 앞에 펼쳐 놓았던 진귀한 물품들이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드니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보의 접근성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대입과 취업이라는 인생의 주요 관문을 통과한 언니들은 가족애를 기초로 동생들에게 입시 정보와 취업 자료들을 내리사랑 해주었다. 동생이 아래로 3명이 있었던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에게도 저런 언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언니가 밟은 길을 그대로 따라 걷기만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은 30대 중반이 된 지금에도 유효하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언니'란 존재가 꼭 혈연관계로 얽힌 연상 여성일 필요는 없다. 한 연예인이 우스갯소리로 자기보다 돈을 많이 벌면 동생도 형, 누나가 될 수 있다고 하던데, 나의 경우 재산을 얼마나 보유하느냐 보다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주요 지표가 되는 듯하다. 나보다 앞서 제로 웨이스트적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언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감과 영감으로 채워진 공간을 찾았다. 대구에 몇 안 되는 제로 웨이스트 상점 중 하나인 “제로 스테이".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통창을 가진 상점은 하얀색 외관과 어울려 그 자체로 시선강탈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힐긋 곁눈질하며 훔쳐보고 싶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건 상점에서 자체적으로 수거하는 물품들이다. 플라스틱 병뚜껑. 헌 크레파스, 양파망, 종이팩들이 업사이클을 위해 한 구석에 모여있다. (덕분에 종이팩들만 따로 모아 두었다가 이 곳으로 가져온다. 우리 아파트 분리수거함에는 종이와 종이팩을 분리하고 있기 않아서 종이팩 자원화가 되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그 옆 진열대에는 생분해 종이 빨대, 반창고, 머리끈을 지나 일회용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실리콘 물약병, 다시 쓸 수 있는 밀랍 랩, 합성 세재 대신 쓰는 소프넛, 그리고 동물실험과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비건 생리대를 볼 수 있다. 


세재를 리필해서 쓰면 세재 용기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분해되거나 지구에 녹아들어 가도 무해한 제품을 소개하는 주인님이 멋지다. 디자인이나 가격보다는 구입하는 제품의 생애 주기 (구입-사용-재처리 및 재사용)를 우선순위로 고려하는 손님도 멋지다. 게다가 이곳은 제로 웨이스트 관련 책을 빌려주기도 한다. 반납하지 않으면 어떡해요?라는 질문에 아직 그런 손님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에 나도 다 읽고 난 제로 웨이스트 관련 책들을 그 곳에 몇 권 두었다.  


물론 제품의 가격은 시중 제품들보다는 비싸다. 제품 특성상 대량생산이 어렵고, 이윤 추구보다는 환경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제작환경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돈이 있어야 제로 웨이스트 한다는 비아냥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우리 몸에 축적되는 미세 플라스틱이 불러올 건강적 해악과 소각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경적 해악을 비용으로 따져보자. 마냥 비싸다고만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애초에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불필요한 소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충동구매를 줄이고 물건 구입에 더 신중해진다. 


동네에 이런 상점이 있다니 나는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는 언니가 생긴 것 마냥 마음이 든든해졌다. (사장님은 굉장한 동안의 소유자로 아마 나보다 생물학적 나이는 어리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생분해 물질은 분해가 되니 분리배출해 땅에 묻어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생분해가 되려면 특정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 나라에는 그런 조건을 갖춘 장소가 없어 일반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면 된다고 하신다. 


잠깐 갸우뚱 하는 나를 위해 설령 소각을 하더라도 탄소배출이 줄어 환경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더해 설명해 주신다. 생분해라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생분해성 플라스틱 제품만 따로 분리수거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어야겠다고 뜬금없이 내 의견을 전하자, 생분해되는 제품이라도 지금처럼 쉽게 쓰고 버리는 관행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의견을 주인님께서 내어 주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생각은 행동을 촉구한다. 


나는 오늘 좋은 언니를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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