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와도 쉽게 가까워지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실은 누구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귀는 편이다. 결과적으로 자주 만나는 사람도, 흉허물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도 적다. 일상을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관심 주제가 다르거나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경우, 상대 마음이 다치지 않게 그의 생각도 내 생각도 아닌 더 나은 생각을 끌어내는 데까지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나는 마음을 닫고, 말을 줄인다. 상대가 자신을 확신하는 그만큼 더.
그런 내게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 생각이 같지 않아도, 대화하는 동안 거리를 느끼지 않을 만큼 매우 편한, 그리고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자리가 있다. 독서모임이다. 책이라는 공통 대상을 향한 관심, 흥미가 구성원을 가깝게 만들어준다. 그런 까닭에 두 곳 독서모임에 참석한다. 세 곳이었는데, 얼마 전 한 곳은 포기했다. 모임에서 읽는 책 외에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면 모임 셋은 확실히 무리다.
두 모임은 읽는 책의 성격, 진행 방식, 구성원 모집에서 차이가 난다. 우선 한 곳은 구성원 모집에 개방적이지 않다. 성공회 신부 한 명과 가톨릭 신자 한 명 외에 서로 다른 교파의 개신교 전·현직 목사가 여럿 참여한다. 읽는 책은 사회학·인문학·종교학·신학 서적으로, 딱히 분야를 규정하지 않는다. 신학에 관해서라면, 현재 한국의 보수적 신앙을 가진 분들이 의심할 수도 있을 만큼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그런 개방성이 가능하기 위해 모집할 때 제한을 둔다. 어디에서도 내놓지 못하는 물음을 내놓을 수 있는 안전한 대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전한 대화를 통해 편견에 균열이 가고 그만큼 성장한다고 느낀다. 이전보다는 더 다양한 사람,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게 된다. 얼마 전 읽은 《영성 없는 진보》(온뜰)에서 저자 김상봉이 말하는 ‘서로 주체성’, 타자적 주체에 대한 존중을 경험한다. 서로 다르게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보시기에 좋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다른 모임 하나가 작년 5월 〈복음과상황〉이 자리를 내줘 시작한 모임이다. ‘노년의 고전 읽기, 그리고 쓰기’로 시작했다. 청년은 책 읽기뿐 아니라 모여서 나누는 데까지 시간 내기가 쉽지 않을 테고, 노년이라면 낯선 사람들과 나눔을 할 시간적 여유가 있으려니 생각했다. 편견이었다. 20대에서 60대까지, 사회 경험이 다르고 심지어 종교도 다른 남녀가 신청했다. ‘노년’이라는 타이틀을 떼어낸 후, ‘고전 읽기, 그리고 쓰기’로 시즌2가 진행 중이다. ‘고전’과 ‘읽기’에 덧붙인 ‘쓰기’가 특징이다. 시즌1에서 《레미제라블》을 읽고, 여전히 현대를, 그리고 신앙 문제를 관통하는 내용을 수십 가지 방대한 주제로 풀어내는 작가와 작품에 감동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현대에 뒤떨어지는 가치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질문이 있었다.
그런 질문을 마주하고 해결하기 위해 시즌2는 《고전을 만나는 시간》(미래의창)으로 시작했다. 거기서 또 우리는 많은 걸 배웠다. 혼자라면 굳이 그런 책을 찾아내지도, 질문에 대한 답도 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함께하는 독서라 가능했다. 저자인 앨런 제이콥스는 말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자신의 시대만 아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224쪽) 자신의 시대라는 얄팍한 순간만을 살며 자신이 살지 않았던 시대를 알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과 문화 전체는 그들의 무지로 인해 더 나빠진다고, 그 결과 우리 인격의 밀도가 치르는 비용은 엄청나겠고, 그보다 후손이 치르는 비용은 훨씬 더 들 것이라 한다(224-225쪽 참고).
그가 예로 든 블로거이자 과학기술 전문가인 얼리사 밴스는 ‘긍정적 선택’과 ‘부정적 선택’을 구분하는 방법에 관해 말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부정적 선택의 위험은 매우 적실하다. 얼리사 밴스에 의하면 인재를 선발할 때 지원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중시하는 긍정적 선택(장점 권장)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할 수 없는 일을 중시하는 부정적 선택(단점 제거)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부정적 선택에 초점을 둘 때 사람들 관심을 끄는 후보자 수가 줄어든다. 결점을 찾다 보면, 이 과정에서 뛰어난 인물들마저 벌레 취급을 당하게 된다. 후보자들의 범위가 점점 줄어들어 폭이 지나치게 좁아지고, 분명 사고도 그만큼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손쉽게 관리할 수 있고 내용상으로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개념들의 꾸러기만 손에 쥐게 된다(85-87쪽).
앨런 제이콥스는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일 경우가 많다고 한다. ‘큰 여기’(공간의 대역폭, 우주를 포함할 정도로 큰 여기)와 ‘긴 지금’(시간의 대역폭)을 향해 개방성과 인내심을 갖춘 사람, 약간의 지루함과 약간의 혼동, 약간의 짜증을 감내할 의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바로 그것,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열려있다고 한다(160쪽). 고전을 읽으면서 일어났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나니, ‘고전’을 더 헤아리며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열네 살 소년이었을 때, 나의 아버지는 너무 무식해서 그 노인 곁에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가 스물한 살이 되자, 나는 7년 동안 그 노인이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에 대해 놀랐다.”
마크 트웨인이 한 말을 들으며 동시에 ‘큰 여기’와 ‘긴 지금’을 생각하며 오래된 과거를 살아낸 사람과 지금을 살아내는 우리의 관계를 떠올렸다. 오래된 과거를 살았던 노인은 우리의 부모요, 우리는 그들의 자녀라고. 우리는 과거 조상의 한계를 마주하며 무식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그들을 향한 존경을 거둔 적도 있다. 그러나 또 조금 다른 때에 가서는 바로 그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지혜에 놀라곤 했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에 이르지 못했으리라. 우리는 그들의 지혜를 물려받아 지금에 이르렀다.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 역시, 마크 트웨인이 한 말에 들어있는 통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청소년기에는 자기 부모가 아닌 어떤 다른 개성화된 사람이 되려 한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어린 시절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부모가 곁에 존재할 때는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형성하지만, 성년기에 접어들면 스스로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성년기로 가는 탐색의 시간인 청소년기는 매우 격정적인 반란의 시기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부모를 포함해 선배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깨닫는다. 결국, 우리도 부모들과 상당히 비슷한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우리가 부모님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부모님이 얼마나 확고하게 우리 속에 살고 계신지를. 그것을 알기 위해 시간과 거리가 필요하다고 조너선 색스는 말한다.
나 역시 이미 예순 후반을 넘어 일흔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내 부모가 살아계실 적 하셨던 말들과 생전의 지혜에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마크 트웨인과 조너선 색스, 그리고 앨런 제이콥스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이제까지 얄팍한 앎에 기초해 누군가와 어떤 생각들을 향해 선을 그으며 부정했던 습관 대신해 공간과 시간의 대역폭 안에서 인격의 밀도를 높이려고 한다.
이 모임은 ‘고전’ 외에 ‘쓰기’라는 특성이 있다. ‘쓰는 독서’ 모임이다. 두꺼운 분량, 쉽지 않은 책을 읽고 일정한 분량으로 써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이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 모두가 매우 적극적으로 성실하게 쓰기 과제를 해온다는 게 한편으로는 놀랍지만, 또 한편으로 당연하게 여겨진다. 쓰는 일이 더욱 책 읽기를 매력적으로 만든다면 그렇지 않을까! 쓰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이는 깊이 생각해야만 가능하다. 깊이 생각했을지라도 그걸 글로 옮길 때, 다시 우리는 자기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분명 읽으면서는 알았던 것 같은데 글로 정리하려니 정확하지 않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다. 수없이 흔들리며 생각을 재차 가다듬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놓쳤을지 모르는 숱한 질문이 생기고, 질문은 어느새 가지를 쳐가며 무수한 질문을 만든다. 질문들 안에서 한 사람의 확신은 어느새 흔들리고 구성원 전체가 함께 흔들린다. 단단하게 굳어 피곤해있던 뇌도 함께 흔들리며 작은 숨구멍들을 만들어내고 그 틈을 타고 들어오는 산소의 공급으로 한결 활발해지는 걸 느낄 때, ‘쓰는 독서’의 ‘매력’을 알게 된다.
함께 읽고, 쓰고, 나누면서 깨닫는 게 있다. 글을 쓰는 이는 한결같이 다른 관점을 갖고 글에 접근한다. 한결같이 자기만의 고유한 형식으로 글을 쓴다. 연령대가 다르고(30~70대) 성별이 다르고, 생활해온 환경이(직업 혹은 전공도) 다르고 신앙도 다르기에 전부를 합쳐 비로소 한 권의 책을 소화하는 데 가까워진다. 혼자만의 독서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완전하지 않다. 우리 안에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학에는 문외한인 내가 주워들은 풍월이 있어 지난번 나눔 시간에는 러시아라는 제국의 문학과 식민지였던 한국문학에 나오는 인물들의 차이가 어쩌니 저쩌니 하고, 낭만주의 문학과 사실주의 문학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창피를 두려워하지 않고 떠들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것들이다.
두 곳의 독서모임 이야기를 했다. 각각 특성이 다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두 곳 모두 구성원 안에는 질문이 끝나지 않고, 그로 인해 흔들리는 일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모임과 모임에 참석하는 구성원을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 나는 독서모임이 좋다. 누군가 한 말을 기억한다. 답이 같은 사람끼리는 함께 잘 살 수는 없다.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비록 답은 다르다 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단다. 함께 물으며 단 한 가지 답을 요구하지 않는 장소라면, 그곳에는 아집은 없으리라. 서로 주체성으로 타자적 주체성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이 글은 <복음과상황>가 일주일에 한 번 구독 신청을 한 사람에게 메일링 서비스를 하는, 책과 관련한 내용 <서사의 서사> 16회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