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리고 소설 _ 넷플릭스오리지널드라마 , <트렁크> 김려령/창비
드라마 <트렁크> _넷플릭스 오리지널
세상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덕분에 공공연하게 드라마 덕후를 자칭하는 나는 드라마 광고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리고 순순히 낚인다. 얼마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광고에 영락없이 낚인 핑계 아닌 핑계이다.
세상에. '도깨비' 공유 배우와 '오수재' 서현진 배우의 만남이라니. 두 배우를 대표하는 여러 필모가 있지만 각각 이 두 작품이 그들을 설명하는 대명사라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 같다. 벌써 몇 년 전 드라마인데도 연말이면 드라마 <도깨비>를 다시 봐야 할 것만 같고, 오수재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 두 배우의 만남만으로도 새로운 드라마를 도전할 이유는 충분했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이혼했어요. 10분 전에"라고 말하는 노인지(서현진 분)는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처럼 보인다. 비밀스러운 기간제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는 NM에서 근무하며 그저 계약으로 맺어진 결혼 생활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 전 아내의 추천으로 노인지와 계약결혼을 하는 한정원(공유 분)은 텅 빈 눈을 가지고 있다. 온갖 트라우마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버거운 인물이다. 넘치는 돈으로 호위호식하지만 어쩌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물인 듯하다.
음침하고 여백이 많은 드라마는 서사보다 장면을 눈여겨봐야 한다. 각 장면에서 내포하는 상징이 꽤 많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드라마는 책 읽기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다. 여러 상징들(혹은 상징처럼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고 뒷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들의 세계관을 맞추어 간다. 독서 과정에 일어나는 여러 사고과정이 비슷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드라마 '읽기'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트렁크>_ 김려령/창비
원작이 있다고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책 속 전개를 상상해 보는데, 잘 그려지지 않았다.
어머나. 그런데 작가가 김려령.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등 이미 매체 작품의 원작으로 익숙한 작가이다. 그만큼 이야기는 강렬하고 글 맛이 좋다. 나는 우연히 '우아한 거짓말'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도입이 너무 강렬해 단숨에 읽어야 했던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이라니.
드라마를 완주하기도 전에 책이 도착했다. 드라마의 결말을 확인하고 책을 펼쳤다. 역시 글맛에 술술 읽힌다.
드라마가 책의 구성을 잘 살렸구나 싶었다. 드라마가 책의 여백, 공허함, 쓸쓸함까지 담으려고 애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원작이라는 걸 몰랐다면 소설과 책은 닮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밀스러운 계약 결혼 시스템, 주인공 설정은 차용했지만 실상 다른 이야기로 느껴졌다.
매체의 특성을 잘 활용한 예시로 보였다. 원작의 해체, 재탄생이라는 요즘의 매체 변용 트렌드를 잘 구현하고 있었다.
사실 최근에는 인기 있는 텍스트가 드라마나 영화화되는 경우가 아주 많고, 매체를 변용할 때 새로운 해석이나 서사를 넣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과거 원작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는 원작을 그대로 구현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해리포터 시리즈. 책 시리즈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밤새워 읽은 입장에서 해리포터 영화는 실망 그 자체였다. 나의 상상을 절반도 구현하지 못했다. 어쩌면 MBTI 극 N 성향의 상상력을 무엇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물론 실제처럼 만들기 위한 공은 인정하고 싶다. 특히 영국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다녀오고 그들의 어마어마한 노고를 알게 된 후 책을 구현하는 물리적 한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잘 쓰인 책을 매체변용하는 작품은 늘 조심스럽게 다가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비밀스러운 계약 결혼 서비스
<트렁크> 이야기의 배경은 NM이라는 회사 설정에 있다.
비밀스러운 계약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며 FW (Field Wife), FH를 제공해 주는 회사. 이 회사의 키워드에서 눈여겨볼 단어가 여럿이다.
비밀스러운.
계약 결혼.
결혼 서비스.
결혼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계약' '기간제'는 불편한 단어일 수밖에 없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해피엔딩이며, 사랑의 결실이며 누구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으로 그려지는 결혼이 새로운 인식을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결혼생활을 해본 사람은 다 안다. 결혼은 결코 해피엔딩의 결말은 아니며, 다른 세상의 시작이라는 것을. 떨어지는 결혼율이나 출산율을 보면 현실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매체적 구현이 조심스럽고 힘들었던 건 아닐까?
불편한 설정에 '비밀스러운'이라는 수식어는 더 불편하다. 비밀은 음지의 것이다. 그래서 소설적 허용이 가능한 틈을 만든다.
결혼 서비스. 결혼 생활이 서비스로 인식되는 세상이 올까. 존중과 배려라는 무거운 단어 대신 서비스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러한 소설적 설정들 속에서 책의 이야기는 강렬해졌고 드라마에서 서현진 배우의 캐릭터 해석이 좋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사랑, 저런 사랑. 결국 사랑
직업병인지 어떤 글을 읽으면 주제를 찾기 바쁘다.
작가는 독자에게 무얼 이야기하려고 한 것일까? 글을 쓸 때도 무얼 전달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에게 소설은 그저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방 맞은 듯했다.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단편소설이 어려웠던 이유는 '그래서 무얼 말하고 싶은가'를 찾기 힘든 모호한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귀결될 때쯤 나는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소설 <트렁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어쩌면 극단적인 관계와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닐 수도 있음을.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랑,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한 발로. 불편하지만 실제 삶은 더 불편한 것을. 극단을 느끼며 내 삶에 안도하게 되는 것도 소설의 역할일지 모른다.
드라마 속 인지라는 인물은 메마르고 차갑게 보이지만 누구보다 의리 있고 사랑이 넘친다. 표현할 마땅할 대상이 없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정원이라는 인물이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 마지막 부분. 인지를 발견하고 댕댕이처럼 뛰어오는 정원의 모습이 오래 생각났다. 그의 삶은 이제 시작이구나.
결국 사랑이야기였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강조했고, 책에서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관계에서 이후 인지가 걱정되는 마무리였지만. 그래서 소설이겠지.
드라마를 소설의 뒷이야기쯤으로 생각하련다. 엄태성이 인지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고 두 주인공이 온기를 찾아 살아가는 결말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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