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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칼럼]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 한강 / 창비

by 기혜선


2024년 10월 10일

꾸역꾸역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운동 모드의 워치가 계속 울려댔다. 땀을 닦고 물을 마시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책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인 톡방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모두들 자기 일인 양 감탄하고 감동하며 기뻐했다. 나 역시 마음이 자꾸 부풀었다.

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쁠까? 러닝머신을 달리며 생각했다.

그날 밤부터 오랜만에 북적대는 서점가 소식에는 신이 났다.


2017년 노벨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나를 보내지 마'는 내가 인생 책으로 꼽는 작품이다. 이 책을 몇 번 곱씹어 읽으며 괜히 일본 작가(실상 그는 영국인이다)의 노벨상 수상과 우리나라를 저울질한 적이 있었다. 본연의 멋진 문장을 우리말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했다. 그 일이 현실이 되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소년이 온다


하지만 한강 작가라.. 그녀의 책은 읽을 때마다 버거움으로 남았기에 다시 책을 잡기 두려웠다. 책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이 너무 섬세하게 쪼개져 겪어보지 못한 아픔으로만 기억 되었다.


인연(人緣).

책연(冊緣).


사람도, 책도 오는 때가 있다고 믿는다. 일부러 찾지 않았는데도 ‘소년이 온다’는 다시 내 앞으로 다가온 것 처럼.


노벨상 수상에 한강 작가의 책을 시리즈로 샀다는 엄마는 말했다.


두 번이나 읽었어. 진짜 그랬어. 너무 생생해서 너무 슬프더라.


엄마가 느꼈다는 슬픔이 궁금했다.

오래된 기억은 대부분 감정만 남는다.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의 책이 2024년에는 어떻게 다가올까.

책장을 펼쳤다.


2024년 12월 3일


한강 작가는 노벨상 강연에서 말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성이 동시에 존재한 공간을 광주라 부를 때 광주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리더라고. 그랬다. 이 책은 광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든 어디서라도 반복될 수 있는 역사였다. 설마.. 나의 현실에서는, 오늘 우리에게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아무 일 없던 밤이었다. 다음날 먼 지역에서 강의가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할 일을 미리 챙겨놓을 심산이었다. 아침 반찬거리를 챙기고 쓰레기를 정리하면서 일찍 자려고 마음먹었다.

남편이 방에서 뛰어나오면서 tv를 켠다. 계엄이래.

대학 기숙사에 있는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내일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애써 별일 아닐 거라 다독였다. 우리는 그저 우리 할 일을 하면 돼.

그때도 그랬을까.


<소년이 온다> 한강 / 창비 (2014)

그날 밤 이 책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마주하기 힘들다고 밀어두었던 책을 읽고 그 감정을 추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설마 하던 그 역사의 반복일까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첫 문장부터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까지 숨 한번 크게 쉴 수 없었다. 눈물은 나오는 건지 노안인 건지 아님 눈물이 원래 거기 있었던 건지. 책을 읽는 내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신기하게 흘러내리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닦아도 거기 그대로. 눈물이 줄줄 흐르지 않아 더 슬픈 느낌을 알까. 읽는 사람의 고통도 이러한 데 쓰는 자의 고통은 어땠을까. 당한 자의 고통은....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한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애썼던 것이었다.


P 213.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놀랍게도 2024년에 그 역사를 탐한 이가 있었다. 화가 났다. 국민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 것인가.

하필 노벨 문학상이 우리나라에서 나온 그 시점에. 많은 국민이 문학을 통해 당시의 계엄을 떠올렸고 경험하지 못한 이들도 아프게 느끼고 있는 이 와중에.


시절책연 (時節冊緣)

김효리(2024)는 책을 좋아하는 성인 독자의 독서 경험을 현상학적으로 탐색하였는데 한 인터뷰이가 책을 만나는 인연에 대해 한 말을 시절책연으로 기술했다. 모든 인연은 때가 있다는 불교 용어인 “시절인연” 에서 차용한 말이다.

시절인연의 뜻을 책에 빗대어 해석해 본다. 읽고 쓰기에 진심인 사람들은 그 책이 오는 시기적인 이유가 있다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아마도 내가 처한 상황 맥락에서 책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고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로 밤새워 TV앞을 지켜야 했던 그날 밤. 그리고 이어진 2주간의 실망과 분노. 우리는 또다시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깨어있어야 했다.

혹시라도 달랐을 수 있는 상황에 가슴 쓸어내리면서.


p 95.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24년 끝자락. 수많은 '나'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을 이어 서로에게 전류처럼 흘려보내고 있었다.


결국 사랑_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중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고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는지 반추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내 답한다. 결국 모든 질문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다고.


그렇다. 결국 우리의 본질적 질문은 사랑에서 출발해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데 깊이 동의한다. 가슴 떨리고 설레는 사랑만이 사랑이랴. 우리가 향하는 모든 질문과 갈구의 근원은 나를 향한 사랑, 타인을 위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연결성 속에 작가의 근원적 질문에 답하고 싶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구하고 있다고.



#시절책연

#한강작가

#소년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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