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시오,
나는 여행을 갈 때 반드시 운동화와 운동복 한벌은 꼭 챙겨간다. 직접 걸어서 봐야 아름다운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 여행러도 아니고 맛집을 잘 찾을 수 있는 능력도 없기에 보통 여행은 EBS 한국기행의 도움을 받는다. 무리하게 산에 다니다가 무릎이 망가져서, 이제 올라가고 내려가는 곳은 못 다닌다. 그래서 평지만 다니고 신발은 기능성만 신는다. 남들 처럼 멋지게 의상을 입을 수도 없다. 그러나, 온전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기쁘고 설렌다.
대한민국은 작지만 참 아름다운 나라여서 두발로 걸을 때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지난 겨울엔 강추위를 뚫고 대나무 숲을 걸었다. 대나무 숲은 여름인데, 겨울에 걷다니! 도무지 나는 여행 감각이 무척 떨어지는 사람 같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 달에 1-2번은 꼬박 연락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이태리 친구 루카이다. 최근에 디즈니 루카 영화를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깔깔 댔더니, 자신이 사는 동네의 한 자동차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자동차에 루카가 있다.
루카와의 인연도 참 오래되었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일 하고 있는 사라의 친구였던 루카를 이태리 학생 모임에서 알았다. 사라와 루카 그리고 나머지 이태리 친구들과 저녁 6시부터 아침 9시까지 정치에 대해 술 한방울 안 마시고 주절 거리다 잠이 와서 대화를 파하고 집에 돌아갔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그날 오후, 미사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루카를 다시 만났다. 루카도 미사에 가던 참이였다.
같이 미사에 다녀오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무척 궁금해 했고, 김정은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이 통일을 원하는지도 무척 궁금 해 했다. 또, 평소에 한국 사람들이 콜롬버스를 스페인사람이라고 여기는지 이태리 사람이라고 여기는지도 알고 싶어했다.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루카였다. 같은 과는 아니였지만, 겹치는 수업이 몇 개 있었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 말 동무하기에 참 좋은 친구였다. 희한하게, 시간이 흐르고 자주 만나지 못해도 루카와의 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생에서 가장 애정하는 책 중 하나가 바로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다.
악한 사람들은 잘 되고 왜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가? 이런 질문은 아마 이 시대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생각했을 질문일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보에티우스가 사형을 당하기 전 쓴 산문이다. 철학의 여신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썼는데, 철학의 여신이 “과거의 운명에 대한 미련과 갈망 때문에 스스로를 소진”하고 있다고 보에티우스를 질책한다. 그리고 보에티우스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정확한 관계 규정을 통해 풀어 나간다.
네가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불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고요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드려서 감내하기만 한다면, 너의 운명은 무엇이 되었든 네게 행복하고 복된 것이 된다(p.92).
맞습니다. 이제 나는 부를 통해 만족을 얻을 수 없고, 왕권을 통해 참된 권력을 얻을 수 없으며, 높은 관직을 통해 참된 존경을 받을 수 없고, 영광과 명예를 통해 참된 명성을 얻을 수 없으며, 쾌락을 통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p. 153).
어제는 논문을 쓰다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있어야 또 잘 살아낼 수 있겠지? 오전에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 한통에 가슴이 먹먹하다. 철학의 여신이 보에티우스에게 질책한 것 처럼, 과거의 운명에 대한 미련과 갈망 때문에 스스로를 소진하지 말고 현재를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립구나,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