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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Apr 25. 2020

지나쳤다구요

글쓰기 모임, 네번째 에세이

이 세상에 '잊었다'는 말이 있다는 걸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잊고 나서 어떻게 잊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김혜순 – ‘춤이란 춤’ 中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고 오늘 당장에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실 아주 지나쳤다고 말하기도 뭐할 것이다. 지나친 걸 기억하여 걸음을 멈추고 한번은 돌아보았기 때문에. 그러니, 오늘 무심코 지나친 것은 어쩌면 아주 나중에야 지나친 줄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때에는 그 찬란하다는 봄이 피부에 와닿지도 못하고 마스크 사이로 밭은 숨과 함께 스러지지 않는가.
 
어쩐지 나는 부쩍 옛 노래와 옛 영화를 더듬고 여러 가지 빈티지 아이템들을 탐내고 있다. 유행이 돌고 도는 건지 촌스러운 것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인다. 시간을 거스르는 중에는 별 게 다 그립다. 이전에 모았던 오르골, 인형, 동화 따위가 다 아쉬운 것이다. 그런 것들에 한사코 무심하려 애썼던 과거를 이제야 하나 둘씩 추스르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아프다고만 생각했는데 보듬을 가치가 있던 수많은 감정들. 코 앞에 들이밀 때는 도리질하며 역정을 냈어도 돌이켜보니 소중하게 품게 된, 아스라한 기억들까지. 빠져나온 지 한참 된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저 모든 게 둥글게만 보인다, 어린 나는 그 안에 잔뜩 휘어져 있지만. 그걸 굽어보고 있는 지금 나의 바깥에도 미래의 내가 웃으며 서 있겠지.


 




실은 작년 이 맘 때에 술자리를 울면서 박차고 나갔던 적이 있다. 내 꿈을 충분히 이해하고, 아니 그 뜻은 같이 하지 못하더라도 공감은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다른 이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언제나 묘하게 누구와도 엇나가는 생각들을 품어 왔기에, 날 고쳐쓰려는 사람들에게 잔뜩 이골이 나버린 것이다. 무엇이 보편이고 정상인지에 대한 판단과 훈계가 성마르게 이어질 때에는, ‘아하 그러시군요.’ 이후로 입을 닫는 게 상책이다. 텅 빈 눈동자로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고 나면 사람과 사람 사이 문도 서서히, 닫힌다.
 
지금도 나는 좀 두렵다. 가령 모두가 의존과 연대를 외칠 때에 거리두기가 이미 익숙하다고 중얼거린다면, 따뜻함 안에서 차가움을 슬며시 붙들다보면, 고독과 우울을 가지런히 품고 있노라면, 마치 꿈 속에서 꿈이라고 외쳤을 때 모두가 아득한 무표정으로 건너보듯, 횡단보도를 어떻게 건너는지 절박하게 묻는 사람을 간첩 혹은 외계인으로 오인하듯, 나는 한 순간에 ‘비정상’으로 낙인찍힐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나뿐만 아니라 결국 모두에게, 그저 존중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나는 나, 너는 너로 존재하고 손바닥을 가끔 대보되 몸을 부딪히지 않아도 되는 관계면 족했다. 나의 삶, 사고 방식이 당신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틀린 것일 리가 없다. 다른 색깔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저들을 물들일까봐서인가? 또는 내가 나의 색을 고집하는 것이 단순히 보기 싫은 것일까? 내가 더 유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내게 결코 유연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닫혀있다고 나무랐지만 내게 닫혀 있던 것들은 어쩌면 그들 같았다.

내 생각의 이해를 구하려던 시도들이 부질없이 실망으로 이어지고 만다는 걸 수차례 깨달으면서 서글펐지만 씩씩해졌다. 나를 이리저리 재단하며 구한 적 없는 충고만 한아름 던지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티를 제법 적당히 낼 수도 있게 되었다. 선을 넘어놓고도 일말의 미안한 기색도 없는 자들을 여럿 만나고 나니 거꾸로 전에 무척 미워했던 사람이 기꺼워지는 경험도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내게 조심스럽고 또 정성스럽게 사과를 구했다는 것이었다.
 
사과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불편함을 눈치채고,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보고 인정하고 반성하며, 삐걱거리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그 때 상한 내 감정만 생각해서 그 사람의 섬세함과 용기를 끝까지 모른 척했다. 지금에야 비로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지, 뻣뻣하게 힘주고서 버티기보다 제때 낮추고 굽힐 줄 아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새삼 되새겨보게 되었으니. 나를 위한다던 자들이 날 다치게 했고, 내게 실수했던 사람이 날 가장 살피고 있었다.
 
삶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 보낸 것은 아마도 내일 찾게 될 것이다. 어제 보냈던 것을 오늘 다시 들여다보듯이. 그러니 오늘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고 나는 그것을 좀처럼 붙잡을 수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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