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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Sep 03. 2021

봄, 꽃샘: Week 5

건조함의 위로

그렇구나, 그런가 보다

대화할  공백이 어색하지 않은 정도의 사이를 지향한다. 말이 끊겼을  정적을 메꾸고 싶어 안달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사근사근하거나 배려심이 깊은 대화 상대는, 반대로 아주 싸늘한 것보다야 낫겠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 다소 부담스럽다. 예를 들면 말을  알아들었을  다시 말해준답시고 매번 말을  느리게 하거나 쉽게 바꿔줄 필요는 없다. 했던 말을 다시 같은 속도로 반복해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게다가 모든 대화 토픽에서  지분을 확보해주느라 '아시아는 어때?' '한국은 어때?'하고 물어봐주는 것도, 고맙기는 하지만 떨떠름하다. 그렇게까지 다르지는 않은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우리, 내가 어디 별천지에서  것도 아니고, 아니 별천지에서 왔다 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의견과 경험을 내가 대표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인이어도 김치를  좋아할  있고, 영화 '기생충'  적이 없을  있고 하니 말이다.


바삭한 사람이 좋다, 는 게 한 때 친구들하고 이야기할 때 열을 올리던 나의 이상형 지론이었다. 능글거린다 싶다가도 건조하고, 건조한데 싶다가도 능글거리는 면이 있는 게 매력 포인트다. 사회성이 고도로 발달해서 깐죽거리면서 농을 걸다가도 적당한 때에 물러서거나 발을 빼는, 말하자면 플러팅을 쉴 새 없이 하다가도 어느새 철벽을 치는 유형의 사람이 재미있다. 마음이 동하는 면은 여지를 주면서 까불대는 것보다도 알고 보면 은근히 서늘해서 정을 잘 안 주는, 그래서 속을 알 수 없는 바로 그 부분인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하자면 자주 만나 안면을 튼 사람이 평소에는 아는 척 안 하다가 유독 하루가 길고 지치는 어느 날 저녁, 내게 타이밍 좋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다. 세심하게 신경을 써줄 때는 언제고 귀찮다느니 툴툴대고, 다음 날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굴면서 나 혼자만 친밀감 드나 싶어 살짝 서운하기도 하고, 뭐 이렇게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 사실 미디어에서는 '츤데레'로 종종 비칠 만큼 클리셰이긴 한데,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도통 헷갈리게 만드는 이가 좋은 연인이기까지는 어려우니 이상형과의 연애는 확실히 힘들겠다.


안심이 된 말들


유학 생활 중에 나는 어쩜 이런 말들에 감동을 받나, 싶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나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기반으로 나온 말들이라는 점,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상처를 받을 만큼 냉정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미국으로 올 때 생일 기념으로 동생이 무선 이어폰을 하나 사준 적이 있었는데, 선물 자체도 고마웠지만 그걸 주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뭉클하다. "이거 잃어버리더라도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울면서 찾고 다니지 마. 알았지? 다시 사주면 되잖아." 텍스트로 쓰니까 제법 스위트 해 보이지만 면박을 주는 말투였기 때문에 듣는 순간에는 "나 안 그래, 인마~!" 하면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어폰을 낄 적마다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실은 글을 쓰는 지금도) 내가 얼마나 허둥거리는 앤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 있단 게 이토록 큰 위안이 될 줄이야.


또 한 번은 석사 과정에서 박사 과정으로 진학을 하면서 예전 룸메이트에게 고민과 불안을 털어놓았더랬다. 그랬더니 답장에 이어 전화도 왔다. 같은 외국인 입장이어서인지 작은 것에도 속상하고 좌절하고 무력감이 드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단 게 좋았다. 하지만 가장 의지가 되었던 말은, "내 생각에 네가 합격할 확률은 60% 정도인 것 같아."였다. 누군가 들으면 장담할 수도 없는 건데 저 (쓸데없이) 정확한 수치는 뭔지, 그럼 불합격할 확률은 40%나 된다는 건지 등등 생각이 오히려 많아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편안해졌다. 그렇게 높지도 않지만 낮지도 않은 저 애매한 가능성이 훨씬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넌 무조건 붙을 거야! 잘 될 거야! 네가 아니면 누가 붙겠어? " 하는 식의 응원이었더라면 김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되거나 안 되거나다. 결과를 기다리면서 할 일을 하면 그만이니까, 어떤 상황에든 너무 발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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