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의 성장이 더 크게 와 닿는다. 어릴 때는 좀 크게 옷을 사서 두 계절도 입혔는데 이제는 한 계절 사이에도 올 해 산 옷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아이들의 눈높이가 신기하고, 반갑기도 하지만 작년에 새로 사서 몇 번 입지도 않은 옷을 올 해는 하나도 입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때만큼은 그렇게 아깝고, 아쉬울 수가 없다. 하나도 아니고, 두 아이 모두가 그렇게 크다 보니 계절이 바뀌는 일이 이런 점에서는 반갑지가 않다. 한 계절만 나면 입지 못하는 옷이 되어버리기에 세일하는 저렴한 옷을 사서 입히고 싶지만 이젠 몸 뿐만 아니라 머리(?)마저 커버려서 사다주는 옷은 입지도 않는다. 온라인 쇼핑몰을 뒤지고, 뒤져서 본인만의 스타일로 고른 옷이라야 주구장창 입고 또 입는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과 옷을 가지고 실랑이 하는 일도 이제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쌀쌀해지고 나니 이젠 상의나 하의 중 하나 정도는 긴 팔을 입어줘야 하는데 옷이 하나도 맞지가 않는 둘째는 급기야 호시탐탐 언니 옷을 노리기 시작했다. 큰 아이 역시 있는 옷 중에 맞는 옷이 몇 벌 되지 않으니 외출을 할 때마다 옷 때문에 서로 마음 상하는 일도 발생한다. 그리하야 각자 원하는 옷을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 놓으라고 했더니만 둘째의 옷 장바구니는 아주 통이 컸다. 내가 보기엔 색깔만 다른 옷들인데도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 다르고, 바지 옆에 있는 줄의 색이 다르다며 옷을 한 바구니 담아 놓았다. 온라인 쇼핑몰로 구입하는 옷들이 조금은 한계가 있어서 집근처 매장에 가서 옷구경을 하자고 해도 싫다는 아이들. 그래서 결재는 살짝 미뤄두고 찬찬히 후기를 내가 더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둘째가 와서는 자기가 사달라고 부탁했던 책들을 왜 택배 아저씨가 안 가져오냐고 했다. 요즘 일이 많아서 책을 사달라는 아이의 말에 장바구니에 넣어두라고 해놓고 깜빡 했는데 지금 살펴보니 책 장바구니에도 책들이 한가득이다. 책을 보라고 하면 학습만화부터 잡아 드는 녀석이라 만화책을 구매하는 건 좀 자재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장바구니에는 학습만화책이 5권이나 들어 있었다. 한꺼번에 사주면 그 마저도 대충대충 보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책을 살 때마다 한 권 씩 끼어서 같이 사줘야겠다 했는데, 그리고 곧 월급날이니 월급날에 결재하자 미루다보니 시간이 흘러버렸다.
"엄마! 왜 요즘 자꾸 미뤄요. 내가 책 사달라고 했던 게 언제인데 아직 결재도 안했다고요? 그럼 아까 내가 골라 놓은 옷 결재는 했어요?"
사준다고 해놓고, 자꾸 미뤄둔 건 미안하지만 매일 해야할 일이 정해져 있듯이 매 달 써야 하는 돈도 정해져 있다는 걸 얘기해주려다가 꾹 참았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철 없이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조르는 일도 없었고, 어릴 때부터 마트에 가도 장난감은 구경만 하고, 사준다고 하면 집에 있다며 거절만 하던 아이들이기에 이렇게 자기 의사를 밝히는 게 반갑기도 했다. 게다가 엄마, 아빠가 부자가 아닌 걸 아이들도 알다보니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했다가 입을 꾹 틀어 막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그래왔으니까.
곧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평소에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수 없으니 명절 만큼이라도 작지만 부모님께 용돈은 드리고 싶다. 시외할머님도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청심환이라도 사서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기로 한다. 9월이니 재산세 2기분도 내고, 비싸진 않아도 저렴한 티로 조카들 추석맞이 선물도 하고 싶다. 하지만 별로 큰 것도 아닌데 쉽지가 않다. 게다가 내 월급은 명절 뒤에 나오니 카드사용은 필수가 될 것 같다.
혼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밥 때가 됐다. 하루 종일 두녀석의 삼시세끼를 챙기다보니 요즘 우리 집 냉장고는 자연스레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그나마 시이모님이 주신 열무김치와 친정엄마가 담가주신 배추김치가 한 칸을 차지하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김치만 놓고 먹을 수 없으니 한 두 가지 반찬을 해보기로 한다. 꽈리고추는 없어도 멸치는 넉넉하니 그냥 멸치만 달콤 짭짤하게 볶는다. 냉장고 한 구석에 엊그제 먹던 두부 반모가 있으니 한 끼 단백질은 이것으로 하기로 한다. 신김치도 씻어서 들기름을 넣고 잔불에 달달달 볶아서 두부와 함께 먹기로 하고, 찌개에 넣고 남았던 못생긴 호박 반쪽도 새우젓을 넣고 살짝 볶아서 반찬 갯수를 늘려본다. 뭔가 좀 더 먹음직 스럽게 보이기 위해 새로한 반찬에는 깨소금을 팍!팍! 뿌린다.
'깨소금의 사치' 그래, 이것이 지금 내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인 것이다.
열무김치와 배추김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두부와 들기름 향 가득한 묵은지 볶음.
초록향이 진하게 맛있어 보이는 애호박 새우젓 볶음, 저기 먼 바다에서 우리집을 찾아온 은빛 멸치 볶음까지
그래도 차리고 나니 상이 푸짐해졌다.
"딸들아! 밥 먹자."
' 오늘도 우리 밥 먹고, 힘내서 열심히 하루를 또 지내보자.'
밥상에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깨톡' 하고 문자가 들어온다.
학교 알리미 문자이다. 오늘은 또 무슨일인가 열어 보는데 세상 반가운 소식이다.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아동특별 돌봄 지원금이 오늘 계좌로 지급완료 되었습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아직 밥 숟가락도 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힘이 난다. 오늘 아침 밥은 웬지 더 맛있게 느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