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먹는 김치는 그냥 김치가 아니었다1.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친정 엄마도, 시어머님도
어떤 날은 조금, 어떤 날은 많이,그렇게 틈틈이 재료들을 준비하셨다.
친구네 밭에서 고추를 사시고, 외숙모님 친정 동네 어디에서 마늘을 택배로 주문하시키고,
누구네 배추가 좋다더라, 어디는 무농사가 잘 안됐다더라 하시며 알음 알음 믿을만한 곳에서
하나씩 좋은 재료들을 공수하셨다.
특히 손이 크고 일하는 게 시원시원한 어머님은 고추도 스무근, 서른근 씩 사서
여러날 아파트 주차장에 널었다가 거두었다를 손수하셨는데 요즘은 건조기가 잘 나와서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오늘은 아침부터 어머님이 전화를 하셨다. 별 일 없으면 집에 와서 일하는 것 좀 거들어 달라고 하셨다.
웬만하면 말씀도 안 하시고 뚝딱 일하시는 분인데 전화를 하실 정도면 일이 많구나 싶어서 아침을 먹고
얼른 어머님댁으로 향했다. 우리가 할 일은 잘 마른 고추를 젖은 수건으로 구석구석 닦는 것이었다.
고추를 따서 씻어서 말렸으면 일이 복잡하지 않았는데 밭에서 꼭지 부분이 없도록 고추를 따는 바람에
손이 한 번 더 필요하게 됐다. 꼭지가 따진 고추를 물에 씻게 되면 안에 물이 들어가 그 고추를 말리면
시척지근해진단다. 말린고추에 꼭지 따는 일은 줄었지만 농약도 쳤을텐데 깨끗이 닦지 않는다면
아무리 국산 고추라도 안 좋을 것 같으니 이렇게 한 번 씩이라도 닦아낼 수 밖에 없다. 결국 조삼모사인건가?
시부모님 두 분이서 하셨으면 몇 날 며칠간
'아이고 어깨야! 아이고 허리야!'
하시면서도 쉬지도 못하고 했을 양이었다.
꼬박 4시간 넘게 시부모님과 남편, 사촌형님, 나 이렇게 다섯이서 고추를 닦아도 고추가 쉬이 줄지 않았다.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고추를 닦는데도 고추가 줄지 않자 아버님이 옛날에 할머님이 하시던 말씀을 해주셨다.
"예전에 일을 하는데 농사일이 하도 많으니 끝이 안 나잖아. 그럴때마다 어머니가 그러셨어.
'걱정은 눈이 하고 일은 손이 한다.'고 말이야."
"걱정은 눈이 하고, 일은 손이 한다."
걱정한다고 해서 일이 줄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아님 걱정만 하고 있지 말고 부지런히 일을 하라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님 걱정 하는 사람 따로 있고 일 하는 사람 따로 있다는 의미인가?
말뜻을 헤아리며 쉬지않고 고추를 닦았다. 줄어드는 기미가 안 보인다고 하던 고추닦이도 두포대의 일이 끝날때쯤 아버님이 힘이 드신지 나머지는 다음에 하자고 하셔서 겨우 허리를 폈다.
어깨죽지가 떨어져 나갈것 같다는 게 이런거였지ᆢ두 딸들 어릴 때 한참 아이 안아 재우던 그 시절 이후
참 오랜만에 고통이 어깨 위로 날아들었다. 손가락 끝에서는 하루종일 너무 매웠다는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뒷정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데 아직 세수를 기다리는 고추 한 포대가 눈에 들어왔다.
나머지 고추는 두 분이 주중에 알아서 하신다는데 오늘 닦은 고추 보다 남아있는 포대가 더 크게 느껴져서
한숨이 나왔다.
"걱정은 눈이 하고 일은 손이 한다."
아무래도 주중에 하루, 남은 고추들을 닦으러 어머님댁에 다녀와야겠다.
다음 번엔 화끈거리지 않게 라텍스 장갑 옷이라도 손에 잘 입혀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