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윽수로 오랜만이긴 하네!'
비행기가 무서우니 '고마 됐다'라던 말은 온데간데없다. 아말감들을 반짝이며 엄마가 웃는다. 버스에서는 자는 척하며 슬쩍 보곤 했는데, 엄마는 내내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공항버스에서 꺼내든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아 빼내며 엄마가 웃는데, 생각지 못하게 눈물이 맺힌다. 찬 겨울바람에 눈이 시려 마음도 시린지. '고마 됐다'라던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이제야 공항엘 데려온 게 미안하다. 매해 명절에만 만나도 혹은 어쩌다 건너뛰어도 다음에 찾아가면 되겠다며 무심히 전화 통화로 퉁치던 나도 온 데 간 게 없다. 오늘 아침부터 괜스레 사무치듯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건 내가 한 해 더 나이를 먹어 유독 그런갑다. 겸연쩍은 마음에 캐리어를 드륵드륵 끌고 공항 터미널로 먼저 성큼성큼 들어가 버린다. 환하게 웃는 엄말 보고 눈물 흘리는 영화의 클리셰는 감독이 '컷!' 해주면 일단락될 테지만 지금은 암전 되며 올라올 크레딧이 없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윽수로' 오랜만인 것 같긴 하다. 만약 엄마는 나랑 같이 인천 공항에 갔던 게 마지막이라면 20년 전, 인천 서구에 살 때 즈음 아버지 출장길 배웅하러 엄마랑 같이 인천공항에 갔던 게 마지막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그때 어디로 가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때 인천 공항엘 처음 가봤는데,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이 참 세련된 느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늦은 시간에도 서둘러 어디론가 짐들을 끌고 가는 사람들, 출력된 종이와 전광판을 번갈아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는 사람들, 수트 같은 멋진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 당시엔 보기 드물었던 외국인들, 티비에 나올 법한 멋진 차림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비행기를 곧 타러 가거나 이제 막 입국심사를 마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고, 막연하게 나도 언젠간 비행기를 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공항을 거닐었다. 진짜 캐리어를 끌고 무빙워크를 걸어가는 내 또래의 애들도 있었는데, 부러운 마음보단 '나를 자기들이랑 비슷하게 보지 않았을까?' 하며 들뜨는데 여념이 없을 정도로 내게 그 애들의 세상은 먼 세상이었다. 아버지가 출국장으로 나가신 다음에도 엄마를 졸라 공항에서 그렇게 한참을 거닐었다. 엄마는 그때 무슨 기분이었을까. 지금은 무슨 기분일까.
'좋나?'
'좋, 지~~ 문디 아들 덕에 다른 나라를 다 가보네'
'아, 진짜... 그거, 그렇게,'
'닌 맨날 그리 까탈시럽게, 기다, 아니다... 아장아장 말 몬할 때가 제~일 이뻤다!'
'... 비행기 태워주는 문디 아들은?'
'... 이쁘지, 이뻐!'
우리끼리는 낄낄 거리다가도 체크인을 하고, 수하물을 부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엄마는 살짝 입을 벌리고 공항 직원들과 나를 번갈아 본다. 그러다 또 입을 앙 다물고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는 엄마를 보니 또 괜히 심술이 난다.
'엄마, 어저께 얘기한 거 기억나나? 우리 출국장 어서 들어가야 해~'
'와?'
'그 엄마 그 이 때운 거 그거 금속 탐지기에 다 걸린다니까.'
'에이.... 그렇나...?'
아직 출국 심사장이 보이기 전인 데다 당부하는 내 표정에 엄마도 사뭇 진지해진다. 조금만 미심쩍어도 '그짓말 하지 마라!' 하며 오만상 쓰던 엄마는 여기 낯선 출국장에선 온데간데없다. 엄마는 토끼눈을 뜨고, 마치 엄마 아말감 얘기들을 옆 사람이 들으면 어쩌나 하듯 좌우를 살피며 눈치를 본다. 난 웃길수록 걱정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다정한 말투로 소곤소곤 설명해 준다. 엄마가 심사장에서 겪을 고초를 걱정하는, 비행기표 끊어준 멋진 아들의 모습으로. 엄마가 잘 모르는 단어도 섞어서.
'그렇다니까~ 요새는 도자기나 지르코니아 같은 걸로 때워서 다들 빨리 심사가 끝나는데, 금속 쓴 사람들은 다 추가 검사받는다.'
'치과선 그런 말 없던데...'
'아니, 치과에서 왜 출국하는 과정까지 설명하겠나? 그냥 '이런 게 있는데 뭐로 하겠습니까'하지'
'그체, 맞제.'
'그거 하나씩 따로 봐야 돼서 좀 아프다던데... 그 잇몸 들추며 스케일링하는 거랑 비슷하다드라'
'에이... 그짓말 마라~'
치밀하지 못한 심술에 엄마가 현실감을 찾으려 한다.
'맞다~ 그래서 이렇게 벽 세워서 안에 안 보이게 해 둔 거라. 애들 보면 기겁한다아이가. 치과처럼은 못해둬서 입 벌리면 서서 막 찌르고 본다.'
거짓말이 들통날 것 같으니 괜히 나도 '엄마 맨치로' 소곤소곤 사투리가 더 나온다.
'그렇나... 많은데...'
미간을 조금 찌푸려 엄마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뒤를 한 번 더 돌아본 다음 여권과 티켓을 보여주고 내가 먼저 들어선다. 뒤 따라오는 엄마는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혀를 굴려 양 윗 어금니들을 확인하는데, 만족감과 미안함에 마음이 간질거린다. 심사장 갈래길에서 성큼성큼 걸어 멀찍이 떨어진 쪽으로 도망친다. 출국 심사장으로 꺾어 들어오자마자 엄마는 금속탐지기 주변을 빠르게 획획 둘러본다. 입안을 살피는 사람도 찾아보고, 문디 아들은 어딨나 둘러보는 것 같은데, 내가 웃으면서 손을 휙휙 흔든다. 엄마는 내 쪽으로 오려다가 이미 우리 사이에 또 인파가 끼어들어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따로 밀려갔다.
'퍽, 퍽, 퍽!'
심사장을 지나 면세구역입구에서 엄마를 기다리는데, 엄마가 또 그 위로 손을 꺾어도 아래로 손을 뻗어도 안 닿는 딱 애매한 위치를 정확하게 두들겨 팬다.
'인마!'
패딩 위라서 하나도 안 아프지만 아픈 척을 하며 낄낄거리고 어느샌가 자글자글해진 엄마 손을 잡고 게이트를 향한다.
이코노미석들 중에서도 약간의 비용만 더 지불하면 제일 앞열에 앉을 수 있다. 이 자리는 다리를 좀 더 뻗어 움직일 수 있다. 비즈니스나 일등석은 고교시절 먼발치서 보던 캐리어 끄는 또래 애들만큼 여전히 먼 세상이고 지금의 내게 이 자리는 사치 부리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게다가 내 기준에 사치스러운 자리를 기꺼운 마음으로 엄마에게도 선물할 수 있다니 오늘 내가 유독 잘 나가는 느낌이 든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야 '성공'이라 할 수 있는지는 참 모호하다. 다만 오늘은 다리를 편히 뻗는 엄마를 보며 성공을 느낀다. 처음 탄 비행기에서 가장 신비로웠던 기억은 단단해 보이는 구름이었기에 엄마 자리는 창가자리로 준비했다. 창가에서 내려다본 구름 위로 누군가는 발을 딛고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먼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단단해 보이는 구름을 내려다본 적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하늘 위 세상 이야기들을 그리 할 수 있었을까. 창밖을 내다보는 엄마에게 나는 어땠었는지도 말을 건네보려다 골똘한 생각에 빠진 옆모습에 그냥 그만둔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려다보이는 구름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아침 일찍부터 괜히 더 들떠 있었던 건 내쪽이었는지 꽤 곤히 잠들었었다. 등받이를 조정해 달라는 승무원의 요청에 깨어나고선 부스스 엄마 쪽을 두리번거리는데, 내가 잠들기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 엄마는 창가를 보고 있었다.
'엄마, 안 피곤 해요? 좀 주무시지'
'잠 안 온다. 이제 내려가나 보네.'
'그르게, 타보니 안 무섭제?'
'무섭긴, 왜, 그냥 말이 그랬지.'
사실을 고백할 때 겸연쩍은 엄마 특유의 표정을 보니 또 괜히 심술이 난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진짜 고집은...'
'흐흥, 니도 니 새끼 나봐라. 어쩌나 보자.'
'난 다 해달라 할 건데? 해준다면 다 옳다구나 할 건데?'
'하이구야~ 어쩌나 보자.'
'그니까 이젠 내 말도 좀 듣고, 내가 어디 가자면 좀 가요. 엄마 아들 돈 잘 번다.'
생색 좀 내려니 괜히 엄마는 또 심술 난 표정이다. 어디 가서 잘 번다 말하고 다닐 궁번은 아니지만 내 씀씀이에는 부족치 않게 버니 잘 버는 게 맞지. 그래도 누가 들을세라 나름 소곤거리는데, 엄마는 또 카랑카랑하게
'많이 벌기는 개뿔, 그래서 언제 집 사게?'
'아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신 데는 누구 집인데? 참나...'
'그게 니집이가, 은행집이지~!'
'아, 됐다! 거 한 번 따라오는 게 유세다 유세. 유세는 내가 부려야지, 왜 엄마가?'
'아껴 써라.'
'아, 알아요~ 쓸만하니까 쓰는 거지!'
제일 앞 좌석이라 착륙 전 건너편에 앉은 승무원들이 우릴 흘깃흘깃 보는데, 지금 우리가 싸우는 건 아니라고 해명하는 의미로 이따금씩 파르르 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비행기 못 타서 안 간다던 거짓말이 들통나서인지, 나한테 고마운데 쑥스러워서인지, 우리 엄마 목청 참 좋다. 창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물어보며 낭만적인 대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엄마도 다른 말들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솔직하지 못하고 맨날 틱틱거리는 이 두 사람은 애꿎게 큰소리만 친다.
그런데 엄마는 정말 평생을 아껴 써왔다. 나도 덩달아 설거지할 때 물을 받아놓고 설거지를 해야 마음이 편하고, 쓰지 않는 전자기들이 연결된 멀티탭들은 서둘러 끄고 싶다. 엄마 잔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어떤 날은 내가 엄마 같은 잔소리를 한다. 스무 살이 되어 수도세를 스스로 내보고선 물까지 아끼는 것보다는 그 달에 닭강정 한 번 덜 사 먹는 게 더 낫겠다 싶었고, 여전히 수도세와 물을 아끼는 엄마는 뭐가 그리 아까운가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닭강정도 안 사 먹고, 물도 받아놓고 썼다. 언젠가 물을 틀어놓은 채로 설거지하는 여자친구를 지적해 놓고 겸연쩍은 마음에 '지구를 위해서'라는 고결한 변명을 했었다. 늘 아껴 쓰던 엄마가 한 번씩 큰 마음먹곤 할 때가 있어왔는데, 결국 다 나였다. 소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시장 가면 내 손엔 귀한 바나나가 들려있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들어가면 입을 옷을 사자며 백화점의 thursday island 매장에서 17만 원이나 하는 코트를 샀었고, 15년을 입었다. 문득 옛날의 인천공항이 생각났고, 여기서 옷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도 자기들과 비슷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맘에 들떠있던 기억도 난다.
'덜컹! 수와아아악!'
'아고고, 엄마야...'
엄마가 갑자기 내 왼손을 꽉 잡는다. 서로 딴 데만 보고 있었는데, 착륙은 조금 무서웠나 보다. 비행기가 멈출 때까지 앉으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엄마, 나도 잘 아낀다. 근데 엄마도 나도 쓸 줄을 모르잖아요. 난 이제 우리 가난하다고 생각 안 한다. 한참은 다 내덕이라 생각했는데, 악착같이 사는 거 다 어디서 보고 배웠겠노?'
'...'
'비행기 재밌제? 우리 여행하면서 돈 얘기하지 마요. 나는 갑자기 엄마가 내 대학 입학 할 때 처음으로 백화점에서 코트사주던 날 기억나드라. 기억나나?'
'그게 언젠데...'
'이 여행 다 엄마 꺼예요. 근데, 여 돈들은 이미 다 쓴 거라 이젠 엄마 꺼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 여행비 남으면 호텔 바닥에 다 버리뿔끼라.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있음 저어언~부 다 해야 한다. 알겠제?'
'하이고야... 버리긴 왜 버려, 말을 해도~'
'알겠제?'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다~'
엄마는 손이 참 작다. 이 작은 손을 언제 잡았는지 참 아득하게 그리고 그립게 느껴진다. 아마 어린 시절에 잡고 다니던 시절이 생각나서 그런 걸까. 또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엄마 손을 잡고 팔걸이 위에서 아래위로 흔들흔들 흔들어본다.
'자, 짐 내릴게요. 내리자.'
우리의 발이 되어줄 이코카카드를 충전하고, 승하차구 위치가 한국과는 반대인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간다. 뒷문으로 타면 승차 시엔 버스의 뒤로도, 앞으로도 가기 편하지만 만석 버스에서 내릴 때 '스미마셍'을 연발하며 내려야 한다. 다만 앞에서 승차하면 좀처럼 승객들이 뒤로 가질 않는 것에 비해 내리기 위해선 어차피 출구로 와야만 하는 것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구조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 것이 처음인 엄마는 어느샌가 불평하는 것도 잊은 채 약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과 나를 살피며 착착 잘 따라 한다. 사실 나도 교토에는 수년 전 한 번 그것도 반나절 정도 머물렀던 것이 다라서 잘 모르고 일본어도 몇 가지 인사말 또는 '이키로, 소나타와 우츠쿠시', '네또와 코다이다와' 따위가 다다. 그리고 솔직히 좀 전에 버스도 앞으로 타려 했다. 엄마가 긴장한 데에는 나만 따라오라던 아들놈도 뚝딱거리니 썩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도 일조했으리라.
대로변에서 키요미즈데라 쪽으로 올라가는 초입 부위에 있는 작은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야 나도 엄마도 긴장이 풀린다. 1박에 20만 원이 훌쩍 넘는 숙소였으나 생각보다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분명 욕조가 있다고 했는데, 무릎을 가슴팍까지 쪼그리고 앉아야 들어갈 수 있는 욕조일 줄은 몰랐네. 큰 소리 땅땅 치며 데려온 여행치고 숙소가 좁고 작아서 엄마 눈치를 좀 살폈으나 별 말은 없었다. 뭐라 하면 '일본은 숙소가 원~래 이렇다.'라고 맞받아칠 참이었는데, 되려 아무 말 없으니 민망한 마음이 든다.
'좀 좁지? 대신에 여기서 제일 멋진 절이 바로 근처예요.'
'아니다, 좋다. 짐은 거기 옆에 두면 되겠네.'
'대신에 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야야, 대신에는 무슨~'
엄마가 내 어깰 짝짝 때리며 웃는다. 엄살 부리기도 민망해서 그냥 피식 웃고 니시키 시장에 구경 갈 채비를 한다.
시장은 엄마와의 기억이 많다. 뒤에 업혀서 바나나를 쥐어먹던 기억(이게 정말 내 기억인지 엄마한테 자주 들어서 만들어진 장면인지는 정확지 않다.)부터 지하실 같은 냄새와 나프탈렌 냄새가 섞여 나는 것 같던 구간을 지나면 생선비린내가 나던 구포 시장, 가깝게는 중고등학생 시절 북변동 5일장 등등. 다만, 중학생 즈음부터는 시장을 안 따라갔던 것 같다. 숙제도 하고 공부도 했겠지마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엔 마트 말고 시장을 간다는 게 그리고 흥정하는 과정이 괜히 창피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 손 잡고 따라다니던 시절에나 시장을 따라다녔구나.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자고 일어나서 다시 잠들 때까지 단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은 엄마였다. 널뛰기하는 기억들이 많은 장면을 빨리 감으며 노이즈처럼 지나가버린 순간들엔 늘 엄마가 함께 혹은 방 너머 어딘가에 있었겠지. 니시키 시장에 이르러보니 여행객들은 여기에 다 모였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사람들이 붐빈다. 그래도 비수기라 그런지 넷플릭스 '필이 좋은 여행, 한입만!'에서 봤던 것만큼 일렬로 줄지어 다닐 만큼 붐비지는 않는다. 비슷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지만 제멋대로 파여있는 돌바닥 여기저기에 있는 물 웅덩이를 피하느라 바닥만 보며 엄마 손에 이끌려 걷던 시장이 기억난다. 오늘 니시키 시장에서는 내가 앞에서 뒤로 손을 뻗어 엄마 손을 잡고 간다.
'여기가 400년이나 된 시장이래요.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억나나? 그 사람 시절부터 공식 시장이었대요.'
'이야.. 임진왜란 즈음부터 있었네. 근데 세련됐네.'
'임진왜란? 아유, 당연히 고쳐왔겠지~'
'그렇나, 그랬겠지. 그래도 참 용하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역사책들을 자주 봤던 것 같다. 나 읽으라고 사둔 책들이었을 텐데, 역사책들은 안방에 들어가 있던 일들이 생각난다.
'나는 400년 얘기 듣고 임진왜란 생각은 몬 한다. 그땐 왕이 누구였어요?'
'뭐, 선조, 광해군, 인조 이 즈음이었지.'
'그땐 일본이랑 사이 안 좋았겠다.'
'그치, 그런데 광해군이 수교도 하고 끌려간 백성들도 데려오고 왕래는 있었다. '
'그럼 막 조선사람들이 일본으로 해외여행도 다니고 그랬나?'
'그건 잘 모르지~ 근데 아마 못 다녔을걸? 해유록이라고 아나?'
'그게 뭐지?'
'조선통신사로 간 사람이 쓴 기행문인데, 그런 거 보면 나라에서 허가한 사람들만 다녀왔을 걸?'
생각해 보면 엄마는 진짜 많은 걸 알고 있기도 했었다. 이렇게 엄마한테 재밌는 얘기들을 듣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은데, 나보고 '말이 많다, 별 걸 다 안다.'던 주변 사람들한테 우리 엄마를 보여주고 싶다.
'이야... 해유록? 우리 싸모님 박식하시네! 별 걸 다 안다. 엄마도 이거 기행문 남기자~'
'뭐라카노~'
'근데, 여기가 원래 차가운 지하수가 흘러서 생선이나 채소를 신선하게 두기 좋아 시장이 된 거라던데...'
'그랬겠네, 니도 별 걸 다 안다.'
'나도 원래 잘 안다. 티비에서 보니까 채소 절임 같은 것도 같이 먹던데 어딘진 모르겠다. 어, 저긴가?'
얼추 비슷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으나 원래 잘 안다던 내가 생각했던 사케와 채소절임을 파는 곳은 아니었다. 전부 일본어로 된 간판들이라 읽을 줄은 모르겠고, 입구 쪽에서 잔으로 사케를 사고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노점들이 들어서있다. 주변 노점에서 산 안주들과 사케를 서서 먹을 수 있는 원통 테이블이 몇 개 있었다. 여러 가지 튀김, 만두, 소고기 꼬치, 해산물 꼬치 등을 파는데, 꼬치 하나에 3천 엔이라니 혼미해진다. 아니, 여기 전통 시장 아니었나. 100엔짜리 잔사케는 미끼 상품이었구나.
'야야, 가격 봐라... 한국돈으로 열 배드라 아니가?'
'... 그러게, 시장치고 좀 비싸긴 하다.'
남은 돈은 호텔 바닥에 다 버리고 올 거라더니.
'아빠 말이 맞네, 무시라... 다 열 배라던데...'
'아니, 엄마, 그건 90년대 얘기고~'
아버지는 1990년 즈음 회사에서 일본 출장을 간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때 1주일가량 일본에 체류하셨다던데, 500엔은 한국돈 500원의 가치와 비슷했다며, 환율을 생각하면 모든 게 한국의 10배였다는 얘기를 수십 년간 해오셨다. 그래서 1주일간 함께 출장 간 직원 여럿과 함께 좁은 여관방 같은 곳에서 머물며 편의점 도시락만 드셨더니 속이 뒤집어지고 메슥거려서 일본이라면 치를 떠신다고... 인터넷 게시글 몇 개만 찾아봐도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걸 알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 봤지만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말을 믿지 못하시고, 엄마 데리고 일본 다녀온다는 길에 또 한 번 더 그 얘길 들었다.
물론 남 말 잘 안 듣고 고집 센 성향 보고 나도 뭐라 할 처지는 못된다. 결국 내가 고집을 부려서 가장 비싼 소고기 꼬치(나는 소고기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닌지라 그저 호기로 산 게 맞다.)를 엄마한테 쥐어주고, 나는 계란말이랑 만두를 샀다. 아기 손에 과자는 웨하스, 과일은 바나나를 쥐어주던 엄마한테 제일 비싼 꼬치를 쥐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계란말이가 이게 뭐냐며 소고기보다도 계란말이에 더 호들갑이다. 계란말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한 거 다 판다고, 더 좋은 거 먹으라고 틱틱거리다가 결국엔 계란꼬치를 하나 더해서 엄마랑 나눠먹는데, 그러게, 그냥 달달하기만 한 게 아니라 감칠맛도 참 좋아서 나도 저 비싼 소고기 꼬치보다 이게 훨씬 좋긴 하다. 계란물에 미원을 탈탈 넣어서 만들었나... 참 신기한 맛이다. 다 아는 것 마냥 '내가 일본 한 번 보여줄게!'하고 왔지만 딱 한 번 반나절 정도 머문 게 다였으니 내가 여기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아는 맛이어도 먹어보자며 게살 꼬치도 먹어보고, 엄마가 돈 아깝다고 사지 말라던 닭꼬치도 사서 먹었더니 나도 엄마도 배가 찬다. 시장을 돌아보며 이래저래 여행객과 상인들도 구경하다 시장이 끝나는 쪽 즈음에 있는 빵가게를 들렀다. 마침 일본 만화책에서나 종종 보던 '멜론빵'이 있길래 하나씩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고야~!'
내가 먼저 침대에 뛰어어 앓는 소리를 한다. 엄마는 캐리어에서 뭘 바스락 거리더니 숙소 책상엘 앉는다.
'엄마, 뭐 해?'
'...'
'엄마, 뭐해요~?'
'기행문'
'아, 진짜?? 그래! 그럼 나중에 나도 보여도~'
몸을 반쯤 일으켜 슬쩍 보는 시늉을 하니까 엄마가 신경질 적으로 몸을 확 챈다.
'뭐 하게? 됐다!'
'에이... 그럼 한.. 내년 즈음에 보여도~'
'...'
대꾸 없이 엄마는 뭔가를 써 내려간다. 엄마는 무슨 얘길 쓰고 있을까. 등을 돌리고 뭔가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낯익으면서도 괜히 가엾다. 오늘 내가 이리저리 데리고 다녀서 피곤할 텐데, 내가 괜히 뭐 기행문 그런 얘기해서 굳이 저러나.
'그래, 그럼 내년에 보여줄게'
'그래! 약속!'
씻기도 귀찮고, 잠이 온다. 시장에서 마신 술 때문인지, 많이 걸어 다녀서인지 정말 오랜만에 이른 저녁 시간부터 졸립다. 오늘 엄마는 무슨 생각들을 했을지 내년에 볼 수 있겠지. 오늘 엄마랑 시장에 간 건 정말 잘했던 것 같다. 내일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다.
'엄마, 나 먼저 잘게요.'
'옹야.'
뭔가를 쓰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대답한다. 왠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대답을 들은 것만 같은 안도감이 잠을 부른다. 오늘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