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주일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 알베르 카뮈)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부고였다면 그 순간만큼은 '아, 그런 일이 생겼구나.' 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GPT에게 이후의 절차와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해 달라고 시켜둔 뒤 지금 하던 일들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었을지도. 최근 몇 년간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잘 모르겠다. 환자 A의 항암 예정일, 환자 B의 부작용 평가일, 환자 C의 면역조직화학염색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입원한 환자 D가 오늘까지 개선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회복될 가능성이 낮을 날 따위로 하루를 센다. 치료가 쉽지 않은 반려동물 가족들의 비극을 연착륙시키느라 여념 없는 나날이 반복된다. 정기적인 비극 속에 추락하고 산산조각 난 내 영혼은 가엾게도 바빠 보이는 내 눈치만 보며 수습해 달란 말 한마디를 못 건네고 풍화되어 간다. 크게 기쁨을 느낀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체로 지난 기억들을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행복한 순간은 분명 있긴 했을 텐데, 딱히 기쁨을 되새기며 기록해두지도 않았을뿐더러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 보려면 부록처럼 딸려올 그 시기 즈음 환자 가족들의 절망한 얼굴들이 두렵다. 그냥 오늘은 다시 환자 A의 항암 예정일, 환자 B의 부작용 평가일, 환자 C의 면역조직화학염색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입원한 환자 D가 오늘까지 개선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회복될 가능성이 낮을 날이다.
그러나 엄마는 내 눈앞에서 죽었다.
5월의 늦은 밤, 엄마는 그날도 늦게까지 혼자 취해가고 있었다. 다만 그날은 노트에 뭔가를 써 내려가던 엄마의 뒷모습이 유독 가엾고 낯설다.
'와았니이...?'
엄마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날 맞이하지만 마치 먼 곳에 있는 내게 기별을 전하는 것만 같다. 늘 그래왔듯 대답 없이 방문을 닫고 들어간다. 좀 세게 닫았던 것 같다. 결국, 이게 그 당시 우리가 다다른 합의점이었다. 고교시절 내내 각자가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의 상처가 어느 정돈지 가늠해 왔고, 이쯤이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적당히 괴로울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난 서로 약속한 만큼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여겼다.
'따악, 딱. 따악, 딱.'
내가 숨을 천천히 세 번 쉬면 술잔이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었다. 지금은 나가봐야 술을 그만 마시게 할 수도 엄마를 달랠 수도 없다. 엄마가 술을 마시는 게 싫었다. 왜 술을 마시는지 알았지만 물어봤었고, 들어봤지만 몰랐다. 엄마는 늘 그렇게 혼자 취해갔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싫었고, 취한 사람들을 이유 없이 미워했다. 미처 엄마에게 다하지 못한 책망은 취한 사람들을 향했다. 이유 없는 미움은 그대로 반향 되었고 세상 모두가 날 미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
속으로 열을 세고, 다시 술잔이 내려올까 한 번 더 열을 세는걸 열 번 반복한다. 술숨 새근거리는 엄마를 데려다 눕히면 이제 또 오늘 밤이 마무리된다. 고요해지자 나도 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는 묘책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나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도 되는 건 아닐까. 그래, 그렇게 하자.
'엄마?'
새벽 거실에 엄마가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다. 수십, 수백날 그렇게 누운 적은 없었고, 술숨 소리가 나질 않은 날도 없었다. 입에는 뭔가를 게워낸 듯한 흔적이 보였고, 불길함이 정수리를 날카롭게 찌른다. 잠든 엄마를 데려다 눕히고 나도 한숨 자고 나면 날이 밝아야 하는데, 여느 날의 약속과는 달랐다.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사실 나는 아무런 약속도 받은 적이 없었단 걸 퍼뜩 깨닫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미 아무런 약속도 없단 걸 이미 알고 있었단 것도 깨닫는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자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수백날 외면해 올 수 있었는지 다급하게 후회하며 엄마 등 밑으로 팔을 밀어 넣는다. 엄마를 들어보려는데, 엄마가 너무 무겁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일이 닥쳐왔지만 내 본능은 '심각하지만 아마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믿었던 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인이라며 이 집을 나서자는 어른행세를 했던 나였지만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내 손보다 더 차가운 엄마 손이 너무 무서워서 소리 내는 법을 잠깐 잊고 가위에 눌린 듯 말문이 막혔다. 안간힘을 써서 양주먹에 힘을 꽉 주고서야 소리를 질러낸다.
'아우,, 아,,, 아,,,, 아,, 아,,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반쯤 벌린 입으로 나와 그다지 다를 바 없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모습의 아버지가 안방에서 뛰쳐나왔고, 그제야 이젠 이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이 솟구친다. 어디선가 봤던 것처럼 가슴팍을 눌러대며 입으로 숨을 불어넣고, '아버지'와 '119'만 반복하며 소리 질렀다. 내 응급처치는 아무 소용이 없을까 봐 무서워 소리를 질러댔다. 입에다 숨을 불어넣고, 소리를 질러대는 동안 내 마음은 '아마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와 '이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사이에서 내 심박수만큼이나 요동치고 있었다. 구급대가 문을 두들기는 순간 잠깐 멈추고 엄마가 숨을 쉬나 봤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때 엄마가 숨을 쉬고 있었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세 번에 한 번씩 따악거리던 술잔 소리가 날 졸리게 또는 잠을 깨게 하고 있었다. 엄마를 데려다 눕히고 밝아올 아침에 나는 입꼬리를 내리고 눈을 가늘게 뜬 차가운 표정으로 집을 나가겠다고 엄포를 놓으려던 중이었는데. 그러곤 아마도 엄마는 그러지 말자고 우리 같이 노력해 보자고, 그러곤 다시 주말 즈음엔 다시 취해있지 않았을까. 그 지긋지긋했던 일상이 다행이었다고 간절하게 다시 그렇게 지내자는 생각이 들 줄 몰랐다.
응급실까지 향하던 기억은 파편적이다. 흔들리는 앰뷸런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구급대원, 앞창을 통해 비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던 도로의 주황빛 가로등, 머리를 조이는 두통, 내가 계속 '큰일이네, 어쩌지' 따위의 말을 반복하며 내뱉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속으로 되뇌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두통이 심해져 내 머리를 세게 내려치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들은 머릿속에서만 바삐 떠오르던 생각들이었을 뿐이고, 난 그냥 얼어붙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배깅하고 있는 구급대원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떤 모습이 그냥 내 상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저 질려있었거나 분주히 중얼거렸을 스무 살의 나는 그 앰뷸런스 안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손이 차가워지고 입과 코가 말라 잠깐 일어선다. 19년이 지났다. 반 정도 남아있는 노트북 배터리로도 충분할 만큼 간단한 작업일 거라 생각했는데, 명확한 단 하나의 사실로만 기억해 왔다고 믿었던 그날의 순간들 중 어떤 순간들은 서로 상반되는 모습으로 뒤엉켜있어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혼란스러웠던 순간, 내가 품었던 마음과 실제로 내가 했던 행동을 서로 분리해 내는 건 콧잔등에 성기게 들러붙은 거미줄을 헤집어 내는 것만큼이나 거슬리는 일이다. 결국 모두 다 떼어내는 것은 포기하고 차가워진 손을 비빈다. 몇 오라기 남은 거미줄은 오늘 하루를 지내다 보면 어딘가로 옮겨 붙을 테다. 방안에는 그날 밤의 긴장을 덜어보려 틀어뒀던 Agnieszka Hajaduk-Wiese 의 'La Noche'가 수십 번 반복되고 있었다. 음악을 멈추니 공기가 내려앉아 싸늘하다. 단단한 질감의 섬유로 촘촘히 엮은 회색 니트 위에 굵은 털실을 성기게 엮어 포근한 느낌이 드는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거실로 나선다.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따라 밀크티 베이스를 풀고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언젠가 머물렀던 농장에서 갓 짜낸 우유를 마시고 내가 알고 있던 우유와는 맛이 달라 꽤 놀랐던 적이 있다. 유독 이 우유가 특별한 건지 물어봤던 내게 농장직원은 이것이 '진짜 우유'임을 강조하며 시중에 유통되는 것들 중 그나마 가장 진짜와 유사한 건 저온살균해서 유리병에 담긴 우유라 했다. '진짜'와 '가짜'는 직관적으로는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면밀하게 따져보면 사실 그 구분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실 구분하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어떤 시점에 이르러 이 사회가 함께 했던 약속이 뒤바뀌어 '가짜'였던 것이 '진짜'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 순간 '진짜 우유'라는 하나의 단어에 시중의 여러 우유들을 대변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 농장 직원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그럭저럭 도시에서의 생계를 이어갈 만해질 무렵부터 '진짜 우유와 유사한 우유'를 사 먹기 시작했다. 실제로 내게는 그쪽이 더 맛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농장에서의 우유를 같은 가게에서 사 온 티 베이스를 타서 마셔도 매번 맛이 조금씩은 다르다. 이 맛의 차이가 정말 음료의 구성이 매번 바뀌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나의 기준이 항상성이 없는 것인지 직관적인 해답이 아닌 재현성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찾아보려면 계획만 세워봐도 피곤해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할 테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이유로 제멋대로인 맛처럼 내 기억마저 그때그때 제멋대로라면 곤란하단 생각이 든다. 설마 내 삶들이 오늘 아침 내가 깨어나면서 마음대로 공상해 버린 것들이면 어쩌나. 사실 나는 1회용 하루살이 인간이고, 잠들면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우연히 우리 모두는 같은 세상을 공상하며 오늘 아침에 이제 막 이 모습대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이내 산만한 공상을 털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아 19년 전 그날을 되새겨 보려 한다. 나는 처음으로 그날을 순서대로 따라가고 있다. 불현듯 그날이 떠올라 황급히 주의를 돌린 적은 아주 가끔 있었지만 애써 그날을 들여다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모호한 이유가 생겼다.
오늘 아침, 왼손 손바닥 안이 까끌거려 엎드린 채로 깨어났다. 보통은 옆으로 웅크려 깨어나는 편인데, 자는 사이 유독 뒤척였던 걸까. 까끌거리는 느낌에 살짝 왼손을 오므려보니 구겨진 종이 모서리들이 손바닥을 쿡쿡인다.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확 구겨버린 다음 떨구고, 엎드린 채로 머릴 묻고 있는 베개 밑으로 양팔을 팔꿈치까지 쑥 집어넣는다. 팔의 살짝 서늘한 느낌과 눈이 꾸욱 눌리는 기분에 취해 다시 잠들면 얼마나 좋을까.
'하...'
버릇처럼 한숨이 나온다. 내가 어쩌다 종이를 쥐고 잤나. 이내 눈을 감았다가 왼쪽 눈만 겨우 떠 머리맡 시계를 보니 평소 일어날 시간이긴 하다. 애써 다시 감아보지만 어차피 깨면 더 자고 싶다고 잘 수 있었던 적도 없다. 얼추 시간을 따져보니 오늘도 겨우 두세 시간밖에 못 잤다. 엎드린 채로 고갤 아래로 꺾어 흘깃거려 보니 겨우 잠든 날 깨운 그놈의 종이는 내 옆구리 왼편에 구겨진 채로 놓여 있다. 왼손으로 몇 번인가 더듬거려 종이를 집어 팔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오른편으로 돌아 눕는데, 한숨이 또 새어 나온다. 펼쳐보니 옆으로 넓은 노란색 655 포스트잇 종인데, 반대면에 글자가 있나 보다. 언젠가 학회에서 받아온 세로로 긴 포스트잇 뭉치들을 집 여기저기에 뒀던 것 같은데, 이렇게 가로로 긴 포스트잇이 집에 있었나? 무슨 글자지? 내가 가져온 기억은 뚜렷치 않아도 내가 아는 종이이고 내 생활 반경 어디에든 있었을 법한 종이다. 그래서 자기 전엔 없었지만 일어나 보니 내가 쥐고 있었던 이 상황을 쉬이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 안에 무엇이 쓰여있든 이 모든 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란 예감이 들어 종이를 펼쳐본다.
하나, 그날 새벽을 다시 떠올리며 기록할 것
둘,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 첫 순간을 기록할 것
셋, 1 주일 간 여행을 다녀올 것
이 구겨진 655 노랑 포스트잇은 진짜일까. 하물며 이 포스트잇에 써진 이 메모는? 이 메모를 무시하고 다시 포스트잇을 구겨 휴지통에 버린 다음 다시 하루를 이어가면 아마 오늘 저녁을 먹을 즈음 이 기묘한 순간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겠지. 다른 이들도 한 번씩 느끼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리고 이 세상에도 참 기이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루이지애나의 한 수족관에서는 최근 3년간 암컷 상어들만 생활하고 있었던 수조에서 '요코'라는 이름의 아기 상어가 태어났다. 일본의 어떤 만화 속 예언을 근거로 올해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할 거라는 괴담이 퍼졌는데, 놀랍게도 실제로 일본으로의 여행객 수가 급감했다. 우리나라의 유명 국립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직장 동료도 그 괴담을 이유로 여행을 취소했다. 학교 컴퓨터실에서 낄낄거리며 맥스(과거 DOS기반 챗봇)에게 욕을 퍼붓던 나는 이제 GPT에게 공손한 말투로 지식을 구걸한다. 이 세상은 유례없는 풍족을 누리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저기서 불행이 들려온다. 신문 경제면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유례없던 풍전등화라고 했다가 다음 날에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엄마, 기이한 일들, 가난과 불행을 열거하니 적절한 키워드만 나열하면 몇 초만에 이 세상의 무수한 기억들을 쏟아내는 GPT 마냥 우리 가족이 겪어온 여러 일들이 산발적으로 떠오른다. 마산 설렁탕 식당 건물의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시절, 우리 집의 유일한 창문 아래에 그 동네 쓰레기 수거함이 있었다. 매일 아침 엄마가 우리 방을 쓸고 닦았지만 나는 내 몸에서도 그 냄새가 날까 봐 늘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걸었다. 설렁탕집주인아줌마의 지갑이 사라졌던 어떤 겨울날, 범인으로 몰린 엄마가 반짝거리는 구둣주걱이 걸려있던 식당 신발장 옆에서 텅텅텅 가슴 치며 무서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내캉 애 아빠캉 이리 산다고 아까맨키로 아 앞에서 그 카면 안 댑니더!'
다음 날 주인집 아줌마는 결국엔 안방에서 찾았다며 사과했다. 그러나 주인집 아줌마를 잡아먹을 것처럼 소리치던 엄마는 우리 방에 돌아와 조용한 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닦았다. 문을 열고 닫는 차이로 바뀐 엄마 모습에 엄마는 어떤 기분인지를 잘 모르겠어서 바닥을 닦고 있는 엄마 모습을 그저 보고 있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이후로 엄마가 그 사건을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거의 30여 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떠오른다. 이제 와서 불쑥 마산이 밉다. 한약방에 세 들어 살 땐, 비록 뒤뜰에서 뛰어다니다가 엎어져서 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지만 주인집 아저씨가 날 참 귀여워해주셨고 천마총으로 종종 놀러 갔던 추억이 있어서 경주에 대한 기억은 좋다.
기묘한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고, 엄마와 관련된 몇 가지 기억들도 떠올렸더니 이 간결한 메모는 별다른 부연 설명도 없이 날 쉽게 설득해 냈다. 마침 적어도 1~2달 동안은 일을 쉴 예정이었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들여다보던 스페인어 회화 책 보다 이 메모 쪽이 더 흥미롭다. 심지어 스페인은 가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갈 일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일본은 몇 번 가본 적이 있으니 일본어 회화책을 사려했었는데, 막상 서점에서 책을 사려니 아무래도 일본어는 일본에서만 쓰니까 타산이 맞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스페인어 사용 인구가 훨씬 많으니 언젠간 유용한 순간이 있을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이다. 서너 챕터 정도 읽다 펼쳐둔 스페인어 회화책을 겸연쩍게 바라보다 책을 덮고 그 위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거실로 나와 커튼을 젖히고, 얼마 전 알게 된 Agnieszka Hajduk-Wiese의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식탁 의자에 걸어뒀던 베이지 패딩과 청바지를 서재의 스탠드 옷걸이에 걸어두고, 오른쪽 모서리가 해진 파우치에서 맥북을 꺼낸다. 에버노트에 이름 없는 노트북을 하나 만들고 노트도 새로 만든다. 검은 배경의 새 노트에서 점멸하는 삽입점을 응시하며 오늘 아침을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의 이 일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서 순리를 따르는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이 세 가지를 하기 위해 휴직했던 게 아닐까. 도망치듯 결정했던 휴직에 이유가 따라붙으니 합당한 결정을 한 것 같아 흡족하다. 이유를 계속 소급해서 올라가다 보면 결국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부터 그 현상이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대체로 '이쯤이면 웬만큼 설명했다.'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참 많고 그 너머의 이유는 그 정도 수준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다시 개입해서 밝혀내기 전까지 잠시 신에게 맡겨둔다. 침실의 스페인어 책 위에 붙여둔 메모를 집어와 서재 책상에서 몇 번 문질러 구겨진 곳을 펴내고, 책상과 맞닿은 벽면에 메모지를 종이테이프로 붙인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죽음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