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R이요!!!'
응급실에 다다르니 구급차 이송 침대와 함께 흔들리는 엄마를 실어 내리며 구급대원이 소리친다. 달려가는 구급대원을 쫓아가는데, 슬리퍼 앞으로 발이 삐져나오면서 앞부분이 부왁 뜯어졌다. 한 발은 맨발인 채로 쫓아 달려 들어간다.
'하나, 둘, 셋!'
엄마를 옮겨 눕힌 응급실 침상으로 다급한 표정의 의사가 뛰어왔다. 유독 서늘하게 느껴졌던 응급실 바닥은 내가 맨발이어서 그랬었구나. 처음 들어가 본 응급실은 소독약 냄새들도 차갑게 느껴졌다. 요새는 좀 다르지만 내가 어릴 적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등장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되곤 했었다. 뒤죽박죽으로 조각나 있는 여러 모습들 중 한 장면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청진하던 의사가 나직하게 '아, 씨발...'이라고 한 다음 다시 삽관(당시엔 삽관이란 단어도 몰랐고, 그냥 병원에 도착했으니 새 걸로 갈아 끼우는 일반적인 절차라 생각했다.)하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무려 4~5 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엄마는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삽관을 하는 모습을 벙찌게 보고 있는 나를 보고선 간호사가 나를 병상 밖으로 밀어낸다.
'보호자님은 잠시 나가 계세요.'
'차르륵'
암막 같은 병상 커튼이 엄마를 뉘인 병상을 두른다. 밀쳐진 나는 모든 게 의아하고 보호자라는 호칭 또한 생경하다. 미디어에서는 앰뷸런스가 병원에 도착하고, 의사가 등장하고, 병상에서 의식을 차린 환자가 가족을 찾거나 만난다. 사실 그 사이에 생략된 무수한 실패들과 과정들은 그 시절의 비의료계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알 방법이 없다.
'삐삐삐삐, 삐삐삐삐'
부산스러운 기계음이 울린다. 누가 들어도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양손을 비비다 커튼 아래를 보며 멈춘다. 두터운 커튼 아래로 보이는 부산스러운 발디딤. 커튼 밖의 나 역시 제자리에서 부산스럽게 발을 딛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무어라 무어라 외치면 끝 말을 따라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 훅훅 거리는 응급실 의사의 가쁜 숨소리, 쉴 새 없이 울리는 불길한 기계음이 하나로 겹쳐 들리기 시작한다. 가슴은 너무나 쿵쾅거리는데, 어지러우면서 갑자기 졸리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검지 손톱으로 엄지 손가락 위를 계속 긁다가 살이 까져 따끔따끔 피가 난다.
'클리어!'
다시 또 훅훅거리는 가쁜 숨소리. 나도 덩달아 숨이 가빠지고 발을 구른다. 어떤 잡지에서 심폐소생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생률이 떨어지는데, 얼마 안 지나 1% 미만으로 낮아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직관적으로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인데, 굳이 수치화해서 설명하는 데에 품을 참 많이 들였다 생각했었다. 국가에서 전문성을 인정한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치료를 한다면 엄마가 깨어날 거란 막연한 바람을 되뇌었다. 왠지 갑자기 떠오르는 언젠가 읽었던 그 글이 사실일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어느덧 그 글은 오늘 그 응급실 의사의 형체가 되어 '당신의 사정은 딱하지만 이 과정을 영원히 계속할 순 없다.'라고 날 설득하는 것만 같다. 머릿속에선 내가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가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데, 얼굴에 닿은 손이 차고 저려서 다른 사람 손이 내 입을 막는 것 같다.
'흡, 흡, 흡, 흡, 흡...'
소생술을 하는 의료진들의 숨소리가 점점 커진다. 새벽시간의 응급실 서늘한 바닥에 입을 막고 주저앉아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러댄다.
'징, 징, 징.'
왼 손목을 울리는 진동. 그 날 만큼이나 차가워진 손을 들어보니 꽤 오랜 시간 심박수가 빨랐나 보다. 엄지 손가락이 따끔거리는 느낌도 들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세게 긁었나 싶었지만 상처는 없다. 차가운 손으로 후끈 거리는 뒷머리를 꾹꾹 눌러보니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다. 그래도 손은 여전히 차가워서 몇 번 비빈다음 허벅지 아래에 밀어 넣으니 그제야 좀 미지근해진다.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일일 뿐이다. 미지근해진 손으로 미지근하고 침전물이 가라앉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한숨이 올라온다. 마저 몇 모금 더 마시고 모니터를 본다. 입안에 남은 홍차향이 헨젤의 빵부스러기 마냥 돌아오는 길을 밝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빵 부스러기 산짐승들이 다 쪼아 먹지 않았나.
'5월 21일 새벽 3 시 32 분. 사망하셨습니다.'
병상 커튼을 젖히고 주저앉아 있던 날 불러 세워 의사가 무어라 몇 가지 말들을 했는데, 그가 건넨 말들 중 유일하게 선명히 들렸던 말이다.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려 오므려 쥔 양손으로 병상 침대를 짚었다. 엄마는 입을 벌린 채 정말 미동이 없다. 천장이 흘러내리는 것 같고 바닥이 다리를 옆으로 밀어 올리고 손으로 짚은 침대가 내려앉는 것 같이 느껴지니 머리가 핑핑 돈다. 엉금거리는 옆걸음으로 머리맡에 닿아 엄마의 양 볼을 감싸고 엄지로 눈 아래부터 입가까지 볼을 쓰다듬어 누르는데, 엄마가 '컥!' 하고 숨을 토해낸 다음 이내 깜짝 일어나 정말 큰일 날 뻔했단 듯이 거칠게 숨을 몰아쉴 것만 같다. 볼을 몇 번을 문대다 엄마를 끌어안으며 병상 위로 엎어졌다.
너무나 낯선 상황 속 익숙한 엄마 냄새에 순간 일상의 기억이 솟구쳤다. 안방 옷장 냄새가 생각나고 너무 고단하고 피로하다. 그저 이럴 리가 없다는 생각만 반복되다 보니 정말 나 말고 이 모든 사람들이, 옆에 서있는 저 의사까지도 거짓말 같다. 다시 황급히 엄마의 입가, 콧가에 귀를 손은 가져다 대 보지만 엄마는 정말 숨을 안 쉰다.
'이리 온나...'
날 부르는 소리가 나는 쪽 의자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아마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와 '이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사이에서 똑딱이던 메트로놈이 물에 무겁게 젖어가듯 멈춰간다. 의자에 앉은 아버지를 쳐다보며 주저앉아있던 기억이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다. 내 표정은 알 수가 없고, 아버지의 표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 그날 새벽을 다시 떠올리며 기록할 것
덤덤하게 내 기억의 적확함 여부만 가늠해 보면 충분할 것 같던 작업이었으나 참 고된 일이었다. 가늘게 벌린 입은 바싹 마르고,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날처럼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느껴지고, 옷을 껴입어도 손이 차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잊혔던 게 아니었구나. 그날이 너무 무서웠어서 그리고 그 이후로 너무 오랫동안 괴롭고 외로웠기 때문에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슬리퍼가 뜯어진 채 주저앉아 있는 스무 살의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넋을 잃고 있었다. 어깨를 한 번 토닥이기만 해도 풀썩 안겨 엉엉 울 것처럼. 그날의 날 팽개쳐뒀기에 어쩌면 그날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왔던 게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타닥, 다그닥, 다다닥, 다다다다... 위이잉! 윙, 윙, 윙!'
지난 십여 년간 아침이면 엄마가 믹서기에 얼린 과일을 우유에 갈아주던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깨고 연이은 적막함에 천천히 발을 디디고 세수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날들이 종종 있었다. 처음 몇 해 동안에는 심지어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기도 했다.
내 눈높이보다 조금 아래에 붙여둔 포스트잇을 다시 들여다본다.
하나, 그날 새벽을 다시 떠올리며 기록할 것
둘,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 첫 순간을 기록할 것
셋, 1 주일 간 여행을 다녀올 것
미처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하나와 둘은 동의어라고 생각했지만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다시 마주한 그날은 당시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현실감이 없다. 어렴풋한 감정으로만 남아있지만 심지어 당일에 나는 마음 한켠으로는 아직 엄마가 어떠한 치료를 받는 중이라 생각할 정도였고, 잠깐 자다 일어났을 때, 좀 전에 응급실에서 엄마가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나를 보고 있었던 순간이 있었던 걸로 착각하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어떤 날에는 엄마가 크게 아파서 병원에서 치료를 오래 받았던 적이 있었다고 혼동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엄마가 사실은 한 번도 앓은 적 없었던 간암을 앓고 있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치료과정을 거쳤는지 엄마가 퇴원하던 날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했던 날도 있었다. 실제로 엄마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7~8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가 정말로 죽었구나.'를 느꼈던 첫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얼마 전 대학교 입학식 날 마련했던 양복을 입고 사람들이 오면 절을 한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중, 고교 시절 친구들이 왔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대학교 사람들도 한동안 머물러줘서 장례식장에 사람이 붐빈다. 나는 대체로 사람들 사이에서 겉돌던 사람인지라 이들과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니 고마움에 몇 마디 나누다 웃는 얼굴을 하기도 한다.
'아휴, 지금은 친구가 제일인 줄 알지 뭐.'
어떤 아주머니가 내 모습을 못마땅해하며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애꿎은 맞은편 벽면을 보며 툴툴거린다. 스스로를 엄마 친구라 소개했던 사람인데, 나는 그날 처음 본 사람이다. 아마 그 아주머니는 이후에도 문득 그날을 떠올리면 스스로가 응당 해야 할 바를 지적했다 여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예 기억하지도 못하거나. '아니, 지금 제가 얼마나 괴로운지 아시나요?'라고 버럭거린들 애초에 조객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앳된 상주를 두고 비꼬는 말을 기어코 내뱉는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겠나. 소용없는 말은 해보아도 얻을 게 없다. 그러나 아주 조그만 악의만을 품은 말이라도 기어코 내뱉어 버렸을 때, 누군가의 맘에는 평생을 가는 흉이 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방문이 뜸해진 새벽 즈음 엄마 사진을 본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면 엄마가 어제 끓여놓은 백숙을 데워서 밥을 차려주고, 난 우리 집 특유의 백숙에서 한약 냄새가 나서 싫다면서도 그냥저냥 먹는다. 집에 가면 정말 그럴 것 같은데.
이튿날 반나절이 지날 즈음 아버지가 날 불러 어두운 방으로 함께 들어간다. 입관을 한다며 마지막으로 엄마랑 인사를 하라 한다. 마지막 인사라는 말에 버럭 신경질이 난다. 그 순간까지도 집에 가면 엄마하고 밥을 챙겨 먹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었을까. 절을 주고받고 여기 앉으라 하면 앉고 위로의 말을 들으면 감사의 말을 한다. 미셸 공드리의 셀로판 세상처럼 일련의 현실감 없는 이 과정이 끝나면 집으로 가서 한숨 자고 난 후 아무 일이 없었던 보통날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노오란 전구 불빛이 단정하게 수의를 입고 누워있는 엄마를 비추고, 날카로운 소독약 냄새와 비릿한 피냄새 사이로 익숙한 엄마의 살냄새와 머릿내를 맡으니 그제야 숨 가쁜 첫울음이 터져 나온다. 엄마 손이 따뜻하다. 거봐, 우리 엄마 죽은 게 아니라니까.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이번 3월에 엄마 두고 혼자 여행 다녀와서 미안해. 중학생 때 교무실에 자주 불려 가게 해서 미안해. 마산 셋방에서 엄마가 울 때 보고만 있었던 거 미안해. 엄마 보험일 하던 동안 나 맡겨뒀던 집 아들 때렸던 거 미안해. 닭백숙 맛없다고 먹다 말아서 미안해. 엄마는 어떻게 입는지도 다 아는 고등학생이 메이커 잠바 사달래서 미안해. 고등학생 때 학원 안 보내준다고 소리 지르고 화내서 미안해. 우리 집 사정 다 알면서 재수학원 보내달라 했던 거 미안해. 엄마가 상처받을 거 알면서 상처받으라고 했던 말들 나 다 생각나. 다 내가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가난을 창피해해서 미안해. 엄마가 혼낼 땐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였는데, 그때 진짜 미워해서 진짜 미안해. 술에 취해 날 부를 때 신경질 내며 문 닫고 들어가 미안해. 내가 엄마 말을 더 들어줬더라면 그래서 엄마랑 좀 더 시간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 엄마, 엄마. 내가 진짜 너무 미안해. 진짜 정말 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이러지 마.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라고!!! 당시 나는 정말 크게 소리쳤었고 계속 되물었다.
'어?? 어!!!! 지금 이러지 말고, 이제 나 다 반성했으니까! 진짜 반성하니까! 이러지 말고 그만 집에 같이 가자...!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어떡해...'
둘,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 첫 순간을 기록할 것
그 순간을 몇 번 고쳐 썼는데, 고쳐 쓸 때마다 울었다.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날도 울었고, 지금도 운다.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해 보니 마지막 인사를 위해 엄마의 손을 따스하게 데워줬던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정신없었던 첫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엄마와 인사를 하며 이게 정말 일어난 일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었다. 그 이후로는 발인날까지 내내 울기만 했던 것 같다. 발인을 하고 보름 정도 지난 뒤 나는 집을 떠났다.
내 20대는 쉴새가 없었다. 대학 등록금 대출 금리가 7%에 이르던 시절의 등록금, 월세, 생활비를 고등학생 과외로 충당하며 대학을 제때 졸업하는 건 참 고된 일이었다. 7%로 졸업시점까지의 원리합계를 얼추 계산해 보아도 내겐 평생 갚지 못할 돈처럼 보였다. 등록금이 1년에 천만원가량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아껴 써도 월세를 포함하면 1년에 대략 2천만 원은 벌면서 대학을 다녀야 했다. 아무래도 주말은 아침부터 밤까지 과외를 계속해야 했고, 주중에도 적어도 3~4일은 수업이나 실습이 끝나자마자 2시간짜리 과외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매주 여러 번의 시험들이 있었다. 교복마냥 계절이 바뀌어야 달라지는 내 옷차림이며 돈 500원에도 머뭇거리는 나에게 편입생 누나, 복학생 형들이 족보를 챙겨주곤 했었다. 오가는 지하철에서 훑어보던 그 자료들 덕택에 졸업도 했다. 참 고마울 일들이 많았었는데, 당시엔 내내 내 코가 석자라며 고맙단 말조차 인색했던 것 같다. 얼마 전 만났던 내 동기는 지금까지도 날 그 당시 서울대 특유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고 했다. 내 주변의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날 그렇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서운한 맘도 든다. 그리고 내게 손 한 번 뻗어본 적도 없던 사람들의 소곤거림까지 들리는 것 같아 기분은 나빴지만 내가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으니 딱히 변명할 여지는 없었다.
셋, 1 주일 간 여행을 다녀올 것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1 주일 간 여행은 어디로 가야 할까. 마침 아무런 일정이 없으니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러 주방으로 간다. 냉동실에 얼려뒀던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서 문득 백숙이 떠올라 식기며 레토르트 음식을 을 넣어두는 찬장에 백숙은 없나 뒤적여보지만 얼마 전 근처 마트에서 1+1 이라길래 몇 개 사놓은 갈비탕 밖에 없다. 여름에도 감기에 걸리고 식은땀이 자주 나는 날 위해 엄마가 여러 한약재를 함께 넣어 끓여주던 백숙은 늘 짙은 고동색이었다. 발인을 마치고 돌아오니 부엌에 그대로 있던 백숙은 상해버려서 결국 다 버렸었다. 생각해 보면 그 고동색 백숙을 먹은 달에는 잔병치레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맛있진 않았지만 늘 그리운 맛이다.
'땡!'
전자레인지 알람이 울리고 적당히 데운 갈비탕에 밥을 차려 그냥저냥 먹는다. 여행은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래도 이전에 다녀와본 적 있는 곳을 더 완벽하게 여행해 보는 쪽이 좋지 않을까. 이전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만들어둔 노트들을 꺼내어 훑어보는데 갑자기 졸리다. 간만에 찾아온 졸린 기분이 너무 반가웠지만 너무 반겨서 이 졸음이 다시 달아날까 봐 애써 덤덤한 척 침대에 눕는다.
엄마. 내가 진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