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통틀어 꿈이라 할 만한 것이 있었던 20대, 그 20대 시절에서도 반수하고 입학한 대학교 1학년,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학회를 만들었다. 나는 결코 주도하는 입장은 아니었고 다른 친구 몇 명이 먼저 학회를 만들자고 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어서 그냥 이들과 무언가 하고 싶었다. 학회의 주제(?), 정체성은 내가 알기로 경영학과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인문/사회 이슈를 다루는 것이었다. 인문보다 사회, 특히 노동 쪽 주제가 메인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누군가와 일을 할 때면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받쳐주고 지원해주는 게 마음이 편하고 또 잘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노동 이슈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발제하고 자료집을 만들고 동기나 선후배를 불러서 뭔가 행사를 하는 그 자체가 좋았을 뿐이었다. 물론 그때 알게 된 새로운 사회의 구조와 삶의 모습은 각인이 되어 이후 나의 정치적 성향, 아니 성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취향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가 새는데... 아무튼 학회를 만들기로 했으니 학회의 이름도 지어야 했다. 그래서 각자 이름을 고민해보고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는데. 솔직히 다른 친구들의 아이디어는 기억이 안 나고… ㅎㅎ 나는 '숨결'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친구들은 약간 어리둥절해했다. 노동의 숨결? 사회의 숨결? 당시 노동 관련 학회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름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다른 학회? 모임의 이름으로는 '위하여' 같이 동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무언가 당장 행동하려고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힘이 담긴 이름이 트렌드였다.
나의 변은 이러했다. 숨결은 숨과 결이다. 숨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숨을 쉬어야 한다. 들고 나는 순간의 힘, 생명력의 다른 이름이 숨이다. 결은 흐름이다. 물도, 꿈도, 살도 다 결이 있다. 여기로 와서 저기로 흘러간다. 그리고 다 각자의 모양이 있다. 같은 결은 단 하나도 없다. 숨결은 그래서 생명의 흐름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또 이렇게 살아오게 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그것은 노동자의 숨결일 수도 있고, 대학생의 숨결일 수도, 친구의 숨결, 남성/여성의 숨결 등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숨결일 수 있다. 현재에 발을 딛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나가자는 의미로 숨결이라는 이름을 제안한다.
나름대로 고심한 티를 팍팍 내면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돌아보면 내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과하게 진지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 무겁게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네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진지충의 제안이 채택되었다. 나는 내가 제안한 이름이 퍽 멋있고 마음에 들었는데, 나중에 학회 이름을 다른 학과의 선배에게 말했을 때 약간 떨떠름해하며, 하지만 예의를 갖춰 웃으며 신선한 이름이라고 했던 반응이 내게는 약간 상처가 됐다. 그 이후로 숨결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조금씩 어색해졌고 우리의 학회 활동도 각자의 길을 가며 흐지부지되었다. 대학교 신입생, 1년 남짓한 낭만의 유효 기간이 끝난 것이다. 낭만은 끝이 나고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던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방황하며, 그 와중에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가며 친구들과는 적당히 잘 지냈던 것 같다. 이후 교환학생, 군대, 고시 준비 등 각자의 이유로 점점 더 보기 어려워진 친구들은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서 사라진 것일 수도, 둘 다 일수도.
무려 20여 년 전의 일임에도 왜 내가 숨결이라고 했는지, 숨은 뭐고 결은 뭐라고 했는지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내 안에서 빚어 나온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 끝에 나온 단어와 단어의 모양을 그리는 시간은 깊고 넓었다. 길고 짧은 것이 아니었다. 같은 1초라도 무게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왜 어떤 기억은 그토록 생생하고 어떤 기억은 끄트머리조차,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일까. 어떤 말은, 어떤 행동은, 어떤 감정은, 어떤 상황은 그럴까. 또는 그렇지 않을까. 당시의 나는 그때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결에서 점을 하나 찍었다. 선에서 보면 점이지만, 면으로 보면 높고 낮은 굴곡, 입체로 보면 높은 산 혹 깊은 바다였을 것이다. 점, 굴곡, 산이나 바다 뭐가 되었든 내가 보기에 아름답고, 멋있고, 재밌고, 떨림과 울림이 있는 것은 여전히 내 안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가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흐름에서 나온다. 이게 내가 보는 결이다.
그저 흘러가는 흐름도 결이다. 돌아보면 어느 결에 취업을 하고, 어느 결에 결혼을 하고, 어느 결에 아들과 만났다. 하루하루 살아왔고, 앞으로도 대체로 그럴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결 중 어떤 것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서 특별히 짚어보고 알아가고 싶다. 아직까지 나는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 없지만, 다시 따지고 보면 아름답고, 재밌고, 울림과 떨림이 있는 걸 찾고 속으로 정리하고 글로 써보는 것 말이다. 쓸모의 영역에서는 찬밥 취급을 받을지 몰라도, 존재의 영역에서는 갓 지은 밥처럼 귀하고 맛있다. 주걱으로 뒤집을 때 차르르 반짝이는 밥의 빛깔이 가슴 가득 채워지는 듯하다. 그렇기에 글을 쓰고 기록을 남겨 어느 결에서 오고 어느 결에 가는지 뒤미쳐 점을 찍어보려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 보다는 조금 더 자주, 그리고 점점 더 자주 말이다. 어디선가 날 기다릴 또 다른 '숨결'을 만나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정말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