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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Aug 08. 2022

류(流) / 히가시야마 아키라

소설 리뷰

정말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다. 밀리의 서재 메인 화면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눈에 띄어 읽기 시작했다. 작가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고, 제목도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와. 인생 소설 하나 추가요~  


나오키 상이라는 타이틀이 내게 의미를 갖게 된 것은 20대에 미야베 미유키가 쓴 '이유'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다. 그때도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미야베 여사의 책을 찾느라 학교 도서관을 전전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많이 흘러… 10년이 지나고 20년을 향해 가는 시점에 다시 듣게 된 나오키 상 수상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내게는 여전히 신뢰할 만한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기분 좋은 묵직함을 살짝 들어내니 약간의 들뜸과 긴장감이 올라왔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좋은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읽기 전의 모든 것을 지우고 다만 읽을 뿐인 상태가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영어로는 Flow, 한자로는 몰입. 이제 와 보니 의미 심장한 제목이다. 



슬픔만은 안개 속에서 뻗어오는 등대 불빛처럼 늘 거기에 있으면서 우리가 좌절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지. (p.31) 

슬픔에 빠져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슬픔을 빠져나오고 나서는 그래도 살아가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슬픔이 있구나 알게 된다. 돌아오고 싶은 시간과 공간이 있을 때 슬플 수 있다. 돌아오고 싶은 곳이 없다면 일어난 일은 그저 일어난 것일 뿐이다. 등대를 보아도 등대의 불빛이 의미가 없다면 그저 한 조각 나뭇잎처럼 삶의 풍파 속에 표류할 뿐이다.  




"그럼, 이제 갈게" 그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안녕, 치우성."

복도가 살짝 삐걱거렸다. 아주 작게 삐걱댔는데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세상에 균열이 생겼다.
방을 뛰어나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뭔가가 바뀌었을지 모른다. 나와 마오마오를 찢어놓은 잔혹한 사실조차, 둘이 맞설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멀어지는 마오마오의 기척에 그저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걸음 소리가 멈추자 나는 숨을 죽였다. 마오마오가 달려와 내 품에 뛰어들지 않을까 기대했다. 심장이 가슴을 쾅쾅 때렸다. 목숨을 건 남자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문을 두드리듯. 모든 게 아주 정교하게 짜인 농담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금 걷기 시작한 마오마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바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귀를 꽉 막았다. 군대 가기 전날 밤, 더러운 주차장에서 그녀와 치크댄스를 췄다. 그때의 노래가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공허해졌고, 우리의 사랑이 남긴 울림이 끝없이 몸 안에서 쾅쾅 울려댔다. (P.206)

작가들이 쓰는 이야기는 자전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새롭게 창작한 것인지 항상 궁금했다. 그렇지만 경험해보지 않았는데 이런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 작가는 내가 이별을 겪을 때의 마음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알고 있을까? 이별은 너무나 현실이어서 발소리가 멀어지고 '바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데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스스로의 무기력함은 중력에 얹혀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몸을 동그랗게 말 수밖에 없다. 귀를 꽉 막아도 몸 안에서 쾅쾅 울려대는 사랑의 울림은 너무 시끄럽고 관자놀이를 지나가는 피의 흐름은 살갗을 뚫고 나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세다. 어떻게 알았을까? 이 작가도 이런 이별을 해 봤을까? 아니다. 질문이 틀렸다. 어떻게 그 순간을 이런 단어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촉촉해지는 일은 없었다. 뺨이 붉어지지도, 입술이 떨리는 일도 없었다. 둑이 무너지듯 감정을 폭발시키지도 않았다. 다 알고 있구나, 내 기만 같은 것은. 내내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 눈은 건조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그저 잔잔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우는 것만 같았다.

그날, 나는 흐르는 눈물의 뜨거움을 느꼈다.

그러자 그날의 마오마오가 보였다. 문 너머에서 들린 안녕.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진 마오마오도 울고 있었다. 나는 내 눈물에만 정신이 팔려 그녀의 눈물은 보려 하지도 않았다. 문을 살짝 열기만 했어도 제대로 봤을 텐데.

시야메이링은 울고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은 채. 오히려 미소 지으면서.

아아, 그런 건가.

우리는 물고기다. 그래서 아무리 울어도 눈물 같은 건 볼 수 없다. 그녀의 눈물은 떨어지자마자 물에 씻겨 사라진다. 그 모습을 나는 내내 보고도 못 본 척해왔다. (P.240)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휴지 한 장 건네는 매너를 나는 결혼한 후 아내와 여러 번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배웠다. 지금도 가끔 뚝딱이가 되어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있다. 아내가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내 안의 감정과 생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은 눈물을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억울함, 분노, 짜증 또는 변명, 반박, 강변 등에 빼앗겨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렇게 가버린 시간만큼 아내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그렇게 멀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멍하니 있던 시간의 몇 배의 시간과 아내의 인내, 배려가 필요했다. 생각에 빠졌다, 감정에 빠졌다 하지만 결국 못 본 척한 것이다. 내 안의 어항 속에서. 



진심으로 원하는 게 손에 들어오지 않을 때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정반대의 것으로. 그리고 영원히 비슷한 것을 비슷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볼 때마다 타협했다는 현실이 코앞에 놓인다. 하지만 대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비슷한 그것조차 잡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P.240)

영원히 비슷한 것을 비슷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니. 비슷한 그것조차 이 손으로 잡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니. 뼈가 아프다. 거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작가 양반… 지금의 내 삶의 모든 것이 나의 최선이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진심으로 원하는 게 손에 들어오지 않을 때, 비슷한 것이나 혹은 정반대의 것으로 만족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이 선택이 억울하고 서늘할지, 당당하고 따뜻할지도 자신에게 달려 있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른다. 레이웨이와 싸울 때도, 식칼을 움켜쥐고 조폭 사무실로 들어갈 때도, 드럼통에 갇혀 산에서 굴러떨어질 때도, 항상 그랬다. 모든 게 망가질 때 내 마음은 언제나 복원보다는 더 많은 파괴로 기울었다. (P.260)

주인공 예치우성이 겪은 극적인 순간들이 내게는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게 망가지는 경험을 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았을 때, 축구 시합에서 분명히 더 좋은 플레이를 하고 있는데 결과는 지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그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품평할 때 내 마음에서는 강렬한 에너지가 샘솟았다. 에너지는 거칠고 차가웠다. 꾹꾹 눌러 담고도 모자라서 새어 나오지 않게 한 겹 더 둘러쌌다. 그러면 가슴속 서늘함이 견딜 만했다. 나중에 그런 기운이 눈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건 아내에게 들어 처음 알았다. 내가 화를 낼 때 (나는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심장을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 문장이 와닿았던 것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아내가 나에게 알려준 것처럼 미리 화를 내면, 담아두고 눌러두고 둘러싸놓지 말고 그때 미리 표현하면 내 마음속 칼날은 조금 더 뭉툭해졌을까. 아니, 애초에 뭉툭한 칼날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내 눈 속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망가질 때 복원으로 이어지는 사람의 눈은 어떤 것일까. 



할아버지든, 위우원 삼촌이든, 레이웨이든,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 사람이 있던 세계가 사라진다. 나는 그들 없이 살아야만 한다. 원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더 애매하고, 차갑고, 무관심을 숨기려 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내 다리는 얼어붙는다. 따뜻한 외투가 하나씩 벗겨져 알몸이 드러나는 것만 같다. 내 마음은 온기를 원하는데, 그러나 내 영혼은 그렇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영혼은 그들과 있음을 느낀다. 그들의 눈으로 매사를 보고, 그들의 귀로 소리를 듣고, 그들의 태도로 영원한 동경을 품는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오랜 세계로 잠겨간다. 내 마음은 그렇게 위로받는다. (P.271)

모든 사람이 각각 고유한 세계라고 볼 때,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그만큼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일 테다. 그러나 나의 세계 말고 다른 이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다만 나의 세계로 다른 이의 세계를 짐작해 볼 뿐이다. 예치우성이 말하는 마음을 방향성, 영혼을 실존이라고 하면 짐작은 내 마음에서 일어나 영혼에 자리 잡는 일이다. 내 마음에서 소중함이 태어나 영혼이 되어 살아간다. 소중한 이들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게 될 때 비로소 내 영혼에 자리 잡은 그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나의 세상에 살고 있는 그들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몇 개의 인상적인 구절을 적어보았다. 물론 이 책의 매력은 몇 개의 점을 찍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풋풋한 첫사랑,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세대와 세대의 후손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고뇌하는 실존적인 의문들, 진실과 사실을 드나드는 귀신의 존재 등 정말 오랜만에 배가(?) 부른 소설이었다. 초반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읽어나갈 때 입에 착 붙지 않고 누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상관없다. 읽다 보면 예치우성의 이야기를 타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도착하게 될 곳은 아마, 당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히가시야마 아키라 작가님 만세. 민경욱 역자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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