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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K Sep 25. 2019

08 제품디자이너 면접에서 일어났던 일들- 하편

제품 디자인 취업 도전기 08


상반기 하반기가 시작될 즈음에 각 대학의 디자인과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모두 모여 근황을 나누는 실기전형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실기전형이다. 현대자동차가 디자이너 공채를 진행했을 때, 서류접수를 마감하고 바로 그 주말에 모든 지원자들을 불러 실기전형을 했었다. 공채 1단계 지원자들이 모두 모였던 것이다. 졸업하고 소식이 끊겼던 선배들, 모 회사를 다닌다던 선배들, 미술학원에서 같이 입시 준비를 했던 친구 등등. 다 함께 현대자동차 양재 사옥 지하 식당에서 A3 종이 세장에 스케치를 했다. 현대자동차가 공채를 더 이상 안 하면서 이제 이런 풍경은 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꽤 웃픈 상황이었다. 운송기기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과, UXUI 디자인과 등등 베이스도 다 각자 달라서 스케치 스타일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때의 나는 UXUI 직무에 주력을 했던 때였기에 필력은 수준 이하였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디에이션 과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했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매번 떨어졌었다. 필력이 어느 정도 올랐다 생각이 들 때 즈음 현대자동차가 공개채용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실기전형을 겪을 일이 없다가 올해부터 실기시험을 몇 차례 치렀다.


1. 실기전형의 주제


 실기 전형에 임하기 전에 나는 범용적인 주제를 하나 생각했다. 바로 1인 가구와 워라밸. 이 주제는 어떤 업종의 회사라도 적용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가구회사라면 집에서 하는 작은 취미생활에 쓸만한 스몰 체어와 테이블 세트를 그렸다. 화장품 회사라면 퇴근 후 운동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올인원 화장품 케이스를 그리는 식이다. 거기에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더해 부가적인 구조 스케치나 디테일 스케치를 덧붙였다. 어차피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대단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본만 잘 해내자는 느낌으로 Design problem-solution- sketch의 기본구조를 미리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실기전형 주제는 대체로 '트렌드를 반영한 OO을 디자인하시오' , '1인 가구를 위한 OO을 디자인하시오' 이런 식이라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해도 금방 응용해서 적용이 가능했다.


2. 드로잉 도구


마카 드로잉은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느낌이 난다. 그래선지 도구를 개인이 준비해야 하는 실기 면접장에서 물감과 물통 그리고 붓을 챙겨 오는 지원자들도 봤다. 그래도 색연필과 마카를 종류별로 다 챙겨 오는 지원자가 대다수였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했었는데 나중에는 어차피 쓸 색만 쓰지 싶어 만년필 한 자루와 그레이 계열 마카 3개, 채도 높은 마카 2개 정도만 챙겼다. 그러다 한번 만년필로 잘못 그리는 바람에 엉망이 된 스케치를 제출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연필을 꼭 챙겼다.

 어떤 회사는 bic 볼펜만 주고 개인 도구를 못 가져오게도 한다. bic볼펜은 잘 미끄러지고 촉이 두껍다. 이렇게 되면 그냥 진짜 실력 좋은 사람들 앞에 속수무책이다. 연필도 없기에 한 번만에 잘 그려야 한다. 마카로 아웃라인을 정리하는 꼼수도 쓸 수 없다. 이럴 때는 빈 종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다. 이미 그릴 내용이 머릿속에 있지만, 내 손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첫 라인을 잡고 나면 대충 감이 온다. 이번 실기는 망했구나.


+ 미대생이 실기에서 그림을 못 그릴 수 있는가


 대학 입시를 할 때 대부분의 미대 준비생은 실기시험 4시간을 위해 적게는 1년, 많게는 6년 이상(예중/예고를 포함한다면) 투자한다. 거기에 부모님이 쓴 돈만 몇 천만 원은 될 것이다. 억대가 넘는 사례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성대하게 치르는 입시의 끝에 모 회사의 디자인 실기전형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에 와서는 사실 스케치는 기본이라 굳이 학교에서 트레이닝을 시켜주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이다. 그냥 선배들 하는 것을 보고, 유튜브를 보고, 핀터레스트를 보며 혼자 연습하는 케이스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대학입시 때 많이 그린 친구들이 더 잘 그리게 되어있다. 게다가 입시 때 실력이 좋았으면 대학 입학 후에 미술학원 강사도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러면 계속해서 스케치 실력을 단련시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입시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 케이스가 아니었다. 투시를 철저하게 잡는 디자인 실기 전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화면을 구성하는 실기 전형이었다. 그래서 대학 생활 내내 스케치를 해야 하는 일은 웬만하면 피해 다녔다. 팀플을 해도 스케치는 내 담당이 아니었다. 디자인 스케치는 정확하게 그리는 게 관건인데 정확하게 그리는 건 내 전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3D로 투시를 잡고 그리는 건 아직도 어렵다. 그냥 2D로 프런트 뷰와 사이드뷰, 탑뷰만 따는 식으로 근근이 해나갔다. 컨디션 좋으면 3D도 해보고. 그러면서 내 스케치를 보고 어떤 형태인지 이해가 가게 그리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다음 단계는 뭐 포토샵으로 하던, 라이노로 하던 빠르게 해서 보여주면 되니까. 어쨌든 미대생, 정확히는 디자인과 졸업생도 그림을 잘 못 그릴 수 있다.


+화면 구성 실기와 디자인 실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 내가 입시를 할 당시 화면 구성 실기는 주로 디자인 대학이 아니라 조형대학 단위로 입시를 할 때 쓰는 것 같았다. 얼마나 정확하게 사물을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화면을 조화롭게 구성하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뭐가 뭔지 알아보게는 그리긴 한다. 그리고 디자인 실기 전형의 경우 디자인대학 단위에서 입시를 할 때 했었다. 얼마자 정확하게, 틀리지 않고 사물을 표현하냐 와 어떻게 창의적으로 사물을 변형하고 풀어내느냐 가 관건이었지 싶다. 안 해봐서 사실은 잘 모른다. 확실한 건 이 경우에는 투시를 철저히 지켜야 하고 재질 표현에 능해야 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수리논술 비슷한 시험이라 보면 될 것 같다.  


3. PT :  '이렇게도 쓸 수 있겠는데?'와 '이럴 때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실기를 1시간 내지는 3시간 정도 치르고 나면, 그 스케치를 가지고 실무진들 앞에서 PT를 해야 한다. 3시간 만에 그린 디자인이니 말이 안 되는 건 당연하다. 스스로도 알면서 그냥 말이 되는 것이다 자기 최면을 걸고 PT를 했다. 몇 개는 내가 생각해도 진짜 괜찮다 싶었는데, 떨어졌던 걸 보면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지금은 PT에서 내 생각의 과정과 기본적인 발상력, 표현력 정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PT면접에서는 면접관들의 표정을 보면 대충 합불을 가늠할 수 있다. 더 이상 내가 이걸 설명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면접관들이 무관심했다면, 100%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질문도 없고 그저 그들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내 PT를 보고 있다면 나는 이제는 그냥 빨리 끝낸다. 그냥 이들과 나는 결이 다르고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구나 생각하면 될 일이니 빠르게 마음을 접는다. 거기서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면접관들이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런 쪽으로도 쓸 수 있겠는데' 같은 피드백이 오기 시작하면 최선을 다한다. 이때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면접관들이 이해한 컨셉이 다른 컨셉으로 완전히 뒤집힐 수도 있다. 내컨셉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쪽으로 이해하고 있는 면접관들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최대한 경청하고 그들이 이해한 컨셉으로 설명을 해줘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땐 어떻게 하실 건데요?'라는 질문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대체로 내 컨셉의 치명적인 단점을 되물어 보는 경우였다. 여기서 대답을 못해서 커버를 제대로 못하면 그냥 떨어지는 것이다. 이 질문은 지원자님의 컨셉이 말이 안 되는 디자인 컨셉이라는 소리다. 혹은 어차피 서로 극복하기 힘든 단점인 것을 아니까 지원자님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겠다는 것. 여기에서 어설프게 대응했다 생각이 들면 그냥 다시 자소서를 쓰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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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 전형 자리는 기회가 잘 없기에 더 초조하다. 그리고 모든 전형단계의 중반 정도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지친다. 게다가 면접관들이 디자인 실무자들이라 까다롭다. 언젠가 어느 장소에서든 또 마주칠 일이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실제로 떨어진 회사 실기전형의 면접관들과 학교에서 산학을 한 적도 있다. 지금은 해프닝처럼 느껴지지만 그때는 디자인계가 좁구나 싶으면서 괴로웠다. 떨어진 회사의 디자이너들과 매달 회의하고 그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못해서 떨어진 건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해서 내가 더 미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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