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3.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남은 쌕쌕을 홀짝이며 해안가 귀퉁이에 있는 가게를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돌담길로 둘러싸인 길이었다. 머리 위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집들은 전부 단층의 낮은 집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담장은 돌담을 쌓아 만들었다. 그리고 마당엔 푸릇한 잔디가 돋아 있었다. 돌담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까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멀리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어줬다. 엉덩이에는 깔개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직접 허리에 끈으로 연결해서 만든 것 같았다.
길바닥엔 거무스름한 해초가 깔려 있었다. 길에서 말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검은색 기다란 해초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름이 뭐였더라. 우뭇,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다.
후~ 하고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왔다. 으쌰 하고 팔도 쭉 펴봤다. 잠들었던 근육이 쭉 펴지는 느낌이다.
그때 담장에서 익숙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담을 타고 자라 있는 널찍한 잎과 그 끝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저것은… 애호박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어렸을 때 우 실장의 어머니는 애호박으로 찌개를 끓여주고 전도 부쳐주셨다. 특히 애호박전은 간식이 없던 시절의 특식이었다. 전을 부치는 고소한 냄새가 퍼지는 날이면 물놀이를 접고 만세를 외치며 집으로 달려왔다. 노릇한 전을 들어 파를 송송 썰어 넣은 양념장에 콕 찍어서 한 입 베어내면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너무 맛있어서 혼자 먹으려고 연탄광 같은 곳에 숨겨놓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혼자 몰래 들어가서 먹었다.
그래, 맞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이었는데.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애호박전을 먹기도 했다. 대부분 점심시간에 나오는 밑반찬이었다. 하지만 식어빠진 그것에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호박을 보니 새삼 군침이 돌았다. 노릇한 전을 먹고 싶다. 맛있는 막걸리 한 잔과 함께.
추억에 빠진 채 담장 안까지 들어와 버렸다. 돌담 안엔 애호박 말고도 여러 채소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저것은 오이, 그 옆엔 토마토, 그리고 저것은… 한참 쳐다봤다.
“흠흠.”
그때 누군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술궂게 생긴 할배였다. 얼굴은 벌그스름했으며 허리는 꼿꼿했다. 꼬장꼬장한 인상이었다. 코밑에 커다랗게 난 점이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다. 위엔 누렇게 색이 바랜 모시옷을 입고 있었고, 발엔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길에 채소들이 워낙 풍성해서…”
변명하듯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할배는 기분이 상한 듯 픽하고 등을 돌리곤 토마토 줄기를 다듬었다. 우 실장도 괜히 기분이 상해서 돌아 나왔다.
무턱대고 친절한 노인이 있는가 하면, 무조건 배타적인 노인도 있다. 그것이 시골 풍경이다.
우 실장 삶의 템포가 느려졌다.
원래 우 실장은 언제나 전력 질주를 하며 살았다. 처음 보험회사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렇게 결심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을 줄이려 했다. 스스로 효율적인 인간이 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여기선 모든 게 느리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만사태평이다. 해가 뜨면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빈둥거리다 잠이 든다. 우 실장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처음엔 적응이 안 됐다.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어서 초조했다. 하지만 곧 우 실장도 동화되어 갔다. 원래 인간은 근본적으로 게으른 존재인지도 모른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서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족들은 얼굴만 그대로이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원래 짜증을 달고 살던 아이들이 여기선 전혀 달랐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항상 깔깔거리면서 웃고 다녔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며칠 지켜보니 좋아 보였다. 그래, 원래 밝은 애들이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아이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빠에게서 멀어졌다.
처음 직장에 들어갔던 때가 생각났다. 회사에서 우 실장은 귀를 닫고 자기 일에만 전념했다. 이대로 사회에서도 패배자가 되긴 싫었다. 야구에서 실패한 걸 만회하고 싶었다.
처음 회식하는 날, 우 실장은 지금의 도 대표를 만났다. 당시 과장이던 도 대표는 목이 굵고 목소리도 굵은 사내였다. 토속 영화의 주인공 같은 외모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반면 우 실장은 아직 나약했고 비리비리했다.
막 회사에 들어간 우 실장은 윗사람이 주는 술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넙죽넙죽 받아마셨다. 자리를 돌면서 모든 사람들과 한잔씩 주고받았다.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금세 형님 동생이 됐다.
술자리는 1차와 2차를 거쳐, 3차를 쏜살같이 지난 후, 4차를 곁들여, 5차를 쏘아보곤 6차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도 대표는 계속해서 술을 들이부었다. 그러다 동이 틀 무렵 종로 낙원상가 담벼락에서 속에 들어있던 걸 쏟아냈다. 그리고 등을 두드려주던 우 실장에게 생각난 듯 물었다.
“동생, 성공하고 싶나?”
성공. 좋지. 우 실장은 강한 열망을 담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형님 오른팔만 꽉 잡으라고, 알겠나?”
알겠습니다, 형님이라고 했던가. 과장님만 믿는다 했던가. 우 실장은 냉큼 대답하고 우람한 형님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눈을 뜨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알코올을 들이부은 밤이었다. 밤은 길었지만 아침은 짧았다. 지각이었다. 서둘러 출근을 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사무실에 들어가니 우 실장을 뺀 나머지 선배들은 모두 책상에 앉아 있었다. 밤새 형님 동생 하던 얼굴들이 아니었다. 다들 차가운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의 기억은 머나먼 일처럼 아득했다. 슬쩍 도 대표의 얼굴을 봤다. 도 대표는 짙은 눈썹에 힘을 주고 문서를 쏘아보고 있었다. 우 실장은 죄송하다고 소곤대곤 자리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사회생활이란 것도 만만치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활에 가족은 사치였다. 처음 아이들이 태어났을 땐 신기했지만 그뿐이었다. 한가하게 육아에 신경 쓰거나 아이들과 놀아줄 겨를이 없었다. 아이들 얼굴을 볼 시간도 없었다. 가족을 신경 쓰기에 사회는 너무 빨랐다. 템포에 맞추기 위해 언제나 전력 질주를 해야 했다.
우 실장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아빠. 그것이 되기 위해 우 실장은 그렇게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서울 시내에 오십 평대 아파트를 샀고 실장의 직함도 얻게 됐다.
하지만 대신, 아이들의 웃음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