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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 굽는 타자기 Dec 18. 2021

엄마는 내게 '염치없다'라고 말했다

"꾸마, 너는 염치가 없이 엄마, 아빠 말도 안 듣고 선물 받으려고 그래?"

남편이 아이에게 하는 말에 내 얼굴이 붉으락붉으락해졌다. '염치가 없이' 이 말이 내게 날카롭게 혔다.   


"자기야, 꾸마한테 염치가 없다는 말 안 했으면 좋겠어.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내게 '염치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지금까지 가슴에 맺히고 좋지 않네."


결국 불편한 기색을 남편에게 표출하고 나서야 상황 종료. '염치가 없다'는 곱씹어보며 옛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뭔가를 받았을 때  엄마는 으레 내게 '염치가 없다'라고 했다. 염치... 사전적 의미로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왜 엄마가 그런 말을 내게 했을까? 아마도 별 뜻 없이 했을 텐데 가슴에 맺혀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성탄절에 친구들한테 줄 카드를 공들여서 써놓고 다음날 친구한테 그걸 줄까 말까 망설였다. 결국 카드 더미가 쏟아지는 바람에 친구들이 그걸 보게 되자 전해줄 수 있었다.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까 봐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에 정확하게 '염치'라는 단어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내가 뭔가를 말하거나 행동하기에 앞서 그 말이 종종 떠올랐다. '이건 염치가 없는 말일까?', '염치가 없는 행동일까?' 이런 생각들은 날 작아지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서 긁어 부스럼은 아닐까 싶다. 분명한 건 과거를 소환해서 엄마에게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지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나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는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 적어도 내가 상처받았던 말을 우리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어제 피아노 선생님이 꾸마에게 글씨 예쁘게 쓰자고 그랬더니 꾸마가 이렇게 답했단다.

"선생님, 더 예쁘게 안 써도 돼요. 제 글씨 충분히 예뻐요. "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남들이  어떻게 볼까, 실수하지 않을까, 염치없이 굴지 않을까... 이 못난 생각들이 날 위축되게 했다. 하지만 다행히 내 아이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내게 있지 않은 모습에 참 다행이다 싶다.




  

"죄의식을 느끼는 심리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자기 비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기 내면을 향한 분노입니다. 많은 경우, 이 불행한 자기 비난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겁하게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이 '비겁하다'는 말을 통해 어린 시절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팔아서 다른 이들의 사랑을 얻고자 했는지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강한 자기 정체성을 이루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희망 사항에 신경을 쓰며,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배웁니다. 독립적이거나 사람들과 서로 의존하며 사는 것은 그다지 권장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서로 종속적인 관계를 맺도록 훈련받습니다. 타인의 욕구와 삶은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욕구와 삶은 무시하도록 말입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 엘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 수업>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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