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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Jul 28. 2023

같이 살자.

여자 셋과 사는 남자 이야기 - 10

 글쓰기를 미루다 보니, 글을 쓰지 않은지 일 년이 넘어 버렸다. 그렇다고 1년간 글쓰기를 아예 멈춘 것은 아니다. 목사라는 직업상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8장 정도의 소논문 수준의 글을 써야 되기 때문이다. 흔히 설교라는 것은 글쓰기가 우선 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들이 많았다. 작년에는 이태원 참사로 젊은 영혼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올해 여름에 수도권에는 수해가 적었던 반면, 지방에는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을 통해 소중한 생명의 촛불들이 꺼져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뉴스는 나에게 무척 괴롭다. 그리고 또 매우 괴로운 소식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 젊은 선생님의 죽음.


 어떤 게 사실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진 것은 학부모에게 많은 민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민원이 정당한 민원이 아니라, 한 사람을 피 말려 죽일 만큼의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학부모는 자신의 좋은 직업을 들먹이며, 힘없는 선생 한 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실질적인 공포를 선생님에게 휘둘렀다. 이러한 일이 발생되자, 전국에 있는 많은 선생님들이 단체 행동을 시작했다. 21세기 들어서 교원이 이렇게 단체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언제나 선생님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것은 아마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좌파가 만든 '학생인권조례'가 부당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것은 포인트가 빗나간 이야기이다. 학생은 맞아야 되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학생은 맞으면 안 된다. 물론 선생님도 맞으면 안 된다. 내가 초, 중, 고를 다닐 때는 무수한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물론 학생이 선생님을 때린다는 것은 거의 없고, 일방적으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시대이다. 초등학교(국민학교) 다닐 때, 실수로 반에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갔다는 이유로 많은 친구들 앞에서 담임 선생님에게 싸대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게 옳은 폭력인가? 중학생 때는 시험을 봐서 전체등수 떨어진 숫자대로 엎드려서 종아리나 엉덩이를 맞아야 했다. 그래서 성적 발표 다음 날에는 엉덩이나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들었다. 그게 옳은 폭력인가? 고등학생 때는 조별 수학풀이에서 조원 한 명만 틀려도 선생님이 슬리퍼로 조원 전체 뺨을 올려쳤다. 그게 옳은 폭력인가? 나는 학교 다닐 때, 문제가 된 학생이 아니었다. 지각이나 결석은 아픈 게 아니면 한 적이 없고, 숙제도 잘해갔고, 떠들거나, 학칙을 어기거나, 소위 노는 학생도 아니었다. 당연히 술이나 담배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도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폭력을 당하는 것은 피 할 수 없었다. 아마 이러한 부분들이 인권에 대한 생각이 발전하면서 학생 인권조례로 발전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인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든 동등한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서 학보무의 악성 민원이 없었을까? 아니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은 조례 따윈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문제이다. 직장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할 때, 대부분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성인식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장애아에게 선생님이란?


 나의 첫째 달은 자폐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통합반 수업을 받고 있다. 도움반이라고 부르는 장애아를 관리하는 곳에서 따로 교육을 받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의외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많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은 한 명뿐이다. 사람이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아이에게 동일한 관심을 꾸준히 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선생님과 내가 잘 맞지 않는다면 불평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내야 한다. 장애아인 아이도 그것을 통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학기 초에 첫째 아이가 저학년 아이를 안았는지, 아니면 밀었는지(그 부분에서는 정확치가 않아서..) 그 아이가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집은 비상이 걸렸다. 장애아라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아라도 그런 행동은 매우 나쁜 일이고, 당연히 자신의 표현을 잘 못하는 아이를 대신에 부모라는 우리가 사과를 하고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동안 아내와 나는 어떻게 피해보상을 해야 하는지 대화를 나누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쪽 부모님께서 많이 이해를 주셔서,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첫째 아이에게 그전에도 교육을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더 자주 교육하고 있다. 타인을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고, 네가 짜증 난다고 해서 누구를 때리거나 밀어서도 안되며, 만약 도움이 필요할 시, 선생님이나 부모에게 먼저 말하는 것을 계속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일이 도움반이나 담임 선생님이 관리를 못해서 그런 걸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선생님이 수많은 아이들을 다 관리한다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선생님은 신이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셨고, 지방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아버지가 맡았던 학생 중에서 장애아의 이야기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린다고 협박하는 아이, 그리고 운동장에서 누워서 교실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 등등 말이다. 만약 초임 교사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래도 잔뼈가 굵으셨던 아버지는 잘 대처를 하셔서, 그 아이가 스스로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유도를 잘하셨던 것 같다. 어느 날 그 장애학생의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아이를 가르치느라 많이 힘드셨을 거라며, 미안한 감정을 내비치셨다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은 부모님들이 더 힘드셨을 거라고 위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자 그 아이의 어머니가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화'에 가까운가?


 유명 웹툰작가의 자폐자녀가 일종의 선생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경찰에 신고한 뉴스가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댓글을 보니, 장애아를 왜 일반 학교에 보내나, 특수학교에 보내야지 그런 글들이 많이 보인다. 아마 장애아가 없는 사람의 시선일 것이다.


왜 특수학교를 못 보낼까?


 당연히 없어서다. 대기를 해도 언제 들어갈지 모른다. 또한 특수학교가 꼭 좋은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장애아들을 모두 특수학교로 몰아넣는다면, 그곳은 장애수용소가 될 것이다. 장애인들은 정상적인 사람에 비해 인권의 무게가 가벼운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정상적인 아이들도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하고,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통합교육을 하는 것이다. 학교라는 곳은 국어, 영어, 수학만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향과 가치관과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그곳에는 선생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는가? 이것은 선생님의 문제가 아니다.


내 아이가 모두와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것


그것을 위해, 결정권자들이 결정해야 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진상은 어디에나 있다. 진상 한 명을 처리한다고 해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어느 부모나 자기 아이가 가장 소중하다. 본능이다. 그 본능을 억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부모에게도 이 아이가 선생님과 그리고 학우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나만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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