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예배드리세요.
지금처럼 내가 기독교인이요. 목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우리 교회 청년에 농담으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밖에서는 저에게 목사라고 부르지 말고 팀장님이라고 부르세요."
내가 살아가면서 내가 기독교인인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긴 적이 없었다. 또한 내가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도 내가 목사 같은 옷과 말투를 쓰지 않을지라도, 의도적으로 목사라는 것을 숨긴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요새는 내가 교회 다니고 목사인 것을 숨기고 싶을 때가 많이 있다. 나는 광화문에 나가지도 않고, 그들의 주장과 사상에 전혀 동감하거나 지지하지도 않지만, 마치 내가 그 공간에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본래는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느 대형 교회 목사가 대면 예배를 주장하며, '목숨 걸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 주장을 마치 하나님의 명령처럼 여기는 그 교회 성도들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목숨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시대착오적으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6.25 시절에 예수 믿으면 죽인다는 협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정말로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하면, 그 교회 목사들과 성도들은 지금처럼 목숨 걸고 예배드리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일반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신학대학원을 갔다. 신학대학원에 가면 아무래도 대학생 때 신학 전공한 출신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편협함이 많이 느껴질 때가 있다. 기본적인 역사 인식도 부족하고, 과학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는 편이다. 신대원 다닐 때, 교회의 한 청년이 나에게 와서, 과학적인 것으로 보았을 때, 성경과 이해 충돌이 일어난다고 고민 상담을 해왔다. 바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다고 하고, 과학적인 이해로는 우리는 서서히 진화해 왔다고 하기 때문이다. 많은 목사나 전도사들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무조건 적인 믿음을 요구하거나,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거나 폄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무척 잘못된 태도이다.
찰스 다윈도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진화론도 창조론의 한 부분일 뿐이다. 심지어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지, 우리가 특정 단백질과 DNA, RNA로 설계되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 중 가장 큰 착각은 성경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책이 애초부터 아니다. 성경의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창조과학 같은 저급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성경의 중요한 주제는 '사랑'과 '인내'이다.
성전은 무너졌다. 교회라는 말자체도 건물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 (문재인 구속이나 탄핵이 아니고 말이다.) 성경적으로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그저 '교회당'일 뿐이다.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뜻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집을 떠나면 그곳은 더 이상 빈집일 뿐이지 성전이 아니다.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떠나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배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특정 시간에 열리는 종교적 세리모니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기록이자 라이프 스타일이다. 성전에 나와서 표면적으로 거룩해 보이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전 영역 안에 예배의 삶이 이뤄지고 있느냐에 우리가 믿는 신은 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이 전염병이 물러가길 기도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인 덕분에 전염병이 더 창궐하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기독교의 정신은 나를 살려달라는 게 아니라, 나를 죽여 타인을 구하는데 정점이 있다. 그게 바로 예수의 모범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의 주류를 살펴보자면, 자신들이 살자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정신은 어디다 팔아먹은 것일까?
지금의 예배는 거리두기를 철저히 하고, 마스크를 꼭 쓰고, 개인위생에 신경을 쓰는 것,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지 살피는 것 자체가 예배이다. 우리 교회가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회복시키실 것을 설파하는 것도 좋지만, 성도의 삶에서 어떻게 예배가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해야 할 때, 바로 코로나 사태에 기본을 지키는 것도 예배의 삶인 것을 알려야 한다.
거짓 뉴스에 속지 않고,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코로나 사태가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이자 경고가 아니실까? 교만한 자를 치시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고, 이용하는 자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침에 아는 지인이 이러한 문자를 보내왔다.
본래 성경의 아모스 5:21-24은 이러한 내용이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삶이 없는 예배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진짜 목숨 걸고 드려야 할 예배는 교회당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예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작은 영역에서부터 예배는 이뤄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의는 십자가를 뽑아서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죽고, 타인을 살리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예수가 이천 년 전에 짊어졌던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구호나 떼창이 아니다. 그건 콘서트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 24시간 교회당에 앉아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노래 부를지라도 삶 가운데, 아무런 정의도 인내도 없다면,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시간낭비했을 뿐이다.
시간낭비도 하고, 코로나도 걸린 저 사람들이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제발 목숨 걸고 제대로 예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