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일기장

혼잣말처럼 쓰는 나만의 기록

by 고요한 위로
ChatGPT Image 2025년 6월 22일 오전 12_48_57.png

언제부터였을까.
메모장 대신 진짜 종이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스마트폰엔 늘 메모장이 있고,
노트북엔 워드 문서가 있지만,
나는 문득 손으로 꾹꾹 눌러 써내려가고 싶어졌다.

기계가 아닌 나의 손이,
기억을, 감정을,
그리고 나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말할 곳이 없어서, 쓰기 시작했다


이혼 후 처음 몇 달간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가족에게도,
감정은 최대한 담담하게 정리된 문장으로만 전달했다.
“잘 정리됐어.”
“서로 조용히 끝냈어.”
“아이들도 잘 이해해줬고.”

그 말들은 사실 반의 반도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말하는 내가 어색하지 않기 위해 만든 껍질이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속이 비어졌다.
다 쏟아낸 줄 알았는데,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말들이 안에서 퍼져갔다.

그 말을 어디에도 놓을 수 없어
처음엔 낡은 다이어리를 꺼냈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 쓰던,

한쪽 귀퉁이에 크레파스 자국이 남아 있던 노트.

그 위에 썼다.

처음으로 내 감정을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늘 울었다. 괜찮은 척하느라 너무 피곤했다.”

그렇게 한 줄이 시작이었다.




‘좋아요’ 없이, 누르듯 써내려간 말들


SNS에 글을 올리면 반응이 따라온다.
‘좋아요’ 수, 댓글, 공감 이모티콘.

그것들은 때때로 위로가 되지만,
어쩔 땐 내 감정에 가격표를 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감정은 몇 개의 공감을 받을까?’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좋아할까?’
‘너무 우울하게 보이진 않을까?’

그 질문들이 피곤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장을 다시 꺼냈다.


“혼자 사는 건 괜찮다.
그런데 혼자라는 걸 매일 실감하게 만드는 세상이 버겁다.”

“마트에서 마주친 가족 단위가 나를 작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없는 걸 모를 텐데,
나는 그들 속에서 내가 없음을 자꾸만 깨닫는다.

이런 문장은 SNS에 올릴 수 없다.

누군가는 “힘내세요”라고 말할 테고,
누군가는 “그런 글 자꾸 쓰지 마요”라고 충고할 것이다.
혹은 아무 말 없이 지나칠 것이다.

그 침묵이, 말보다 더 아플 때가 있다.


하지만 일기장 속에서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울 수 있고,
비틀거리는 말도 쓸 수 있다.

틀린 문법이어도,
두서없는 감정이어도,
그 누구도 수정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니까.




그날의 기록 – 가장 힘들었던 밤


2023년 1월 9일.

그날은 유난히 춥고, 또 유난히 외로웠던 밤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날은 달랐다.


불 꺼진 집,
젖은 코트를 벗으며
나는 엉겁결에 울었다.
그냥, 주저앉았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무너지게 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어쩌면 눈이었을지도,
그냥 그 날의 침묵이었을지도.


그날 밤,
나는 일기장을 꺼내 처음으로 여러 장을 썼다.
손이 아플 정도로,
그동안 참았던 모든 문장을 쏟아냈다.

“괜찮다고 말하지 말 걸.
도와달라고 한 번이라도 말해볼 걸.
그랬다면 지금 이 밤이 조금은 덜 차가웠을까.”


그 글을 쓰고 나니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은 것도 아닌데
내가 나를 토닥인 기분이었다.

그 이후, 일기장은 나의 작은 병실이 되었다.
상처가 도지는 날이면
나는 조용히 그곳으로 들어가 앉았다.




‘진짜 나’는 아직 그 안에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 참 밝아졌다.”
“이혼 후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아.”
“혼자서도 잘 살아가네.”


그 말들은 고맙지만,
어쩔 땐 그 말들 때문에 더 말할 수 없어진다.

‘나는 밝지 않다’
‘단단한 척할 뿐이다’
‘혼자 잘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는 거다’

하지만 그런 말은
이제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일기장에 쓴다.


진짜 나는 거기에 있다.
쓸쓸한 날엔 휘갈겨 쓴 글씨로,
희미한 희망이 보일 땐 조심스럽게 눌러쓴 글씨로,
아무도 몰래 그렇게 살아간다.




다시 한 장, 오늘의 기록


지금도 매일 쓰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몇 줄, 어떤 날은 몇 장.
어떤 날은 몇 달을 비우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펜을 잡는 순간,
나는 ‘괜찮은 척’을 내려놓고
조금은 진짜 나와 가까워진다.


오늘은 이렇게 쓸 예정이다.

“조용히 무너지지 않아준 나에게 고맙다.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해줘서 고맙다.
내일은 조금 덜 외롭길 바란다.
그래도, 오늘까지 잘 버텼다.”

이 글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겠지만,
이 글 덕분에 나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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