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낯설어진 마음
"언니, 소개팅 한번 해볼래요?"
후배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웃었다.
“내가 지금 소개팅이 어울리는 나이니?”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속마음은 복잡했다.
한편으론 설렘, 다른 한편으론 피곤함, 그리고 익숙한 체념.
혼자가 익숙해지면,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은 누군가의 체온을,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괜찮아?”
“퇴근했어?”
이 짧은 문장을 듣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운 걸까.
후배가 말한 남자는,
이혼 경험이 있고, 아이들은 모두 출가했다는 사람이었다.
직장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고, 혼자 산 지 8년이 넘었단다.
“사람 괜찮아요. 말도 조곤조곤하고, 너무 적극적이지도 않아요.”
후배는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설명했을 것이다.
“너무 적극적인 건 싫지요?”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물어보는데,
그 질문 앞에서 나는 괜히 울컥했다.
맞다.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도,
다가오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조심스럽다.
나를 설명하는 것도,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 사람은 무엇을 좋아할까.
내가 혼자 살게 된 이유를 얼마나 묻고 싶을까.
그리고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래, 한번 만나볼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며칠을,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날 밤부터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토요일 오후, 약속 장소는 조용한 카페였다.
나는 이틀 전부터 옷장을 열어보며 고민했다.
‘이 나이에 소개팅 옷이 따로 있나…’
청바지는 너무 가볍고, 원피스는 어색했다.
결국 무난한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나섰다.
그는 먼저 와 있었다.
생각보다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어색한 웃음과, 격식 있는 말투.
우리는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조심스러운 문장만을 주고받았다.
“요즘은 뭐 하세요?”
“그냥 회사 다니고… 퇴근하고, 집에 가고… 뭐 늘 그렇죠.”
“주말엔요?”
“…거의 집에 있죠. 뭐, 가끔 영화나 보고.”
서로의 말이 겹치지 않으려 조심하고,
침묵이 길어지지 않게 애쓰며
우리는 90분을 버텼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문을 닫은 순간,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피곤했다.
말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럴싸한 나'를 연기하느라.
“나는 왜 이런 자리가 이렇게 낯설고 힘들까.”
누군가와 마주앉는 것이
언젠가부터 내게는 감정노동이 되어 있었다.
사실, 마음 한 켠엔 작은 기대도 있었다.
말이 잘 통하면 어떨까.
다음엔 밥도 먹고, 함께 전시회라도 가보면 어떨까.
그도 혼자고, 나도 혼자고.
둘이서 웃을 수 있는 날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커피가 식어갈수록 식어갔다.
그는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괜찮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거리라는 것이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향해 다시 마음을 여는 데엔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와 회복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그날 다시 알게 되었다.
“좋은 분 같긴 한데… 내겐 아직 아니야.”
그건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누군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였다.
아니, 어쩌면 준비가 아니라
그럴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다 치유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사람은 없다지만,
적어도 그 상처를 덜어낼 수 있는 여유는 있어야 하니까.
나는 그 후로 다시 소개팅 이야기가 나와도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냥 혼자가 편하더라구요.”
그 말은 반쯤 진심이고,
반쯤은 체념이다.
카페에서 혼자 앉아 있으면
가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을 본다.
혼자 책을 읽거나,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그들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처럼, 아무도 기다리지 않기로 한 걸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이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연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는
점점 더 무겁고 낯설어진다.
젊을 땐 그저 대화를 나누고 웃음이 통하면
그게 인연이었다.
지금은,
상대의 과거, 가족, 생활, 가치관, 건강, 감정의 결까지
하나하나 꺼내 보고 확인해야 한다.
그 과정이 지치고,
때론 버겁다.
그래서
그냥 지금처럼 혼자인 게 편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그리워지지 않는 건 아니다.
겨울밤,
이불 속에서 등을 맞대고 있는 온기,
잠들기 전 나지막이 주고받는 인사,
“오늘 어땠어?”라고 묻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런 것들을
아예 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 오래되어
지금의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연’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삼킨다.
사람은 결국 사람에게 위로받는다지만,
나는 아직 스스로를 다 위로하지 못했다.
나 자신에게도 가끔 낯설고,
내 마음조차 완전히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선뜻 내어줄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사람 대신 커피를 마신다.
말 대신 음악을 듣고,
손을 잡는 대신 책장을 넘긴다.
외롭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고요하지만, 텅 비지는 않았다.
다만
인연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너무 낯설어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