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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이 Apr 08. 2024

지원서 100번

100번의 지원서. 사실 세어보지 않아서 정확한 숫자를 가늠할 순 없다. 그런데, 이 전후로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일상이 된 듯하고 프리랜서라는 직업에 수반되는 일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직장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서류전형-> 면접-> 최종합격이라는 절차가 있다면 프리랜서 번역가는 서류전형->샘플테스트->최종합격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이렇게 보면 면접을 보러 가려고 옷을 빼 입고 낯선 장소를 찾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면접을 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듯 보인다.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가지고 있는 이력서를 내고, 서류 합격을 했다는 통보와 함께 샘플테스트 파일을 받는다. 보통 무보수로 이뤄지는 샘플테스트를 거치면 짧게는 2~3일, 길게는 한 달 뒤면 결과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뤄지면 끝인 줄 알았다. 최종 합격 후 번역 에이전시에 등록이 되면 바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을 풀로 일해보고, 지금 6개월을 넘기면서 이 쪽 생태계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없지만 최종 합격 후에도 같은 번역 에이전시에 매 프로젝트마다 지원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라는 것. 즉, A라는 번역 에이전시에 최종합격 후 등록을 한 경우, 프로젝트마다 지원을 또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샘플테스트에서 번역 영역별(. IT, 법률, 마케팅, 의료, 등)로 테스트에 응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전문 분야 외에도 다른 분야 프로젝트가 있을 시 번역 에이전시는 공지를 한다. 관련 영역에서 번역해 본 경험이 있다면 그 이력을 자세히 요청하면서 지원할 사람을 찾는다. 내가 이직 초보 번역가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법률 번역가라고 해서 법률만을 번역하는 번역가는 없는 걸로 안다. 다만 본인의 주력, 전문 분야가 법률이지, 그 외 다른 분야도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이런 기회 앞에서 지원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프로젝트별로 PM이 메일이나 기타 경로를 통해 관련 번역 분야의 경력을 단어수를 포함해 세세히 요청한다. 아마도 그 에이전시에 등록된 수많은 번역가들이 지원을 할 것이다. 약 1년 전에 번역 에이전시 대표님과 사적으로 잠시 카톡으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본인 회사에 등록된 통번역사만 200명이 넘는다고 하셨다. 여하튼 이렇게 프로젝트별 지원서까지 합치면 내가 지원한 지원서가 족히 100번은 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번역 에이전시가 가지고 있는 번역사 풀이 그 회사의 CAPA이기도 하고, 번역을 의뢰하는 수요보다는 공급이 더 많을 것이기에 경쟁이 몹시 치열한 것 같다. 어떤 경우는 의뢰처에서 통번역대학원 졸업자들로 팀을 꾸려 달라고 요청을 받았다며 지원서 없이 바로 문의가 오기도 하고, 한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질 경우 한번 맡았던 번역사에게 일감이 돌아가 그 프로젝트는 지원하지 않았음에도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말한 사례는 모두 내가 직접 겪은 것이기에 2년 차인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을 수 있다. 아마 연차가 올라갈수록 더 많이, 더 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지원시스템 자체보다 지원해서 떨어지는 경우이다. 떨어질 경우 연락을 따로 해주지 않는 게 이 업계의 관례인 듯하다. 소식이 없으면 떨어진 것으로 알면 된다. 그런데 연이어 떨어질 경우, 자신감 하락과 자괴감 등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처음에는 대개 상처받았는데 일을 하다 보니 실력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요율이 맞지 않다든가, 관련 분야에 경력이 미흡하다든가 등등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떨어졌을 경우 지금은 상처가 덜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다. 완전 초보였을 때는 알 수도 없는 그 이유에 매달리며 전전긍긍했다면 이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꼭 내 실력만의 문제는 아님을 알기에 조금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 그 시기에는 책을 많이 읽고 그동안 못했던 일과 공부를 하며 보낸다.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만나고.




최근에 읽은 책에서 와닿는 글귀가 있었다. 

“세상에 위대한 일은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할 때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또 재미가 돌아온다. 운동도 공부도 직장 생활도 하고 싶은 날보다 하기 싫은 날이 더 많은 법이다. 누군가가 성공했다면 그 사람은 하기 싫은 일을 더 오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에선 좋아하는 일만 하라고 하지만 사실 세상에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그에 수반되는 하기 싫은 일도 꿋꿋이 해 나가야 한다. 번역이 좋다면 수많은 지원서와 무보수의 샘플들, 그리고 합격, 불합격의 결과들. 이 모두 일로써 받아들이고 계속해 나가기로 오늘 다시 마음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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