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프리랜서 번역가
퇴사하는 이유는 대부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그중 경중은 다르겠지만 순수히 하나의 이유만으로 퇴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 또한 퇴사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에서도 정해진 출퇴근이 싫었다. 반차나 연차가 아닌 이상 몸이 아파도 출근을 해야 하고, 연차를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특히, 매주 월요일은 임원 회의가 있는 날. 매주 첫째 주 월요일 나는 KTX 첫 차를 타고 서울로, 그 외 나머지 3주는 온라인으로 회의에 참석을 했다. 한 주간 부서에서 일어난 메인 issue를 발표하고 타 부서에는 어떤 일이 있었으며 부서 간 협의할 일은 무엇인지, 시장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매월 budget대비 실적이 어떤지, 타 국가에 비해 현재 한국의 KPI는 어떤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회의였다. 다행히 매월 한번 올라가는 서울행만 하루가 꼬박 걸렸고 나머지 3주의 월요일은 간단히 진행되었다(서로 얼굴을 보면서 하는 미팅은 온라인보다 이상하게 오래 걸린다. 얼굴을 보면 할 말이 많아지나 보다).
퇴사를 하고 월요병이 없어졌다. 시간을 이제 내가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온전히. 그렇게 보고 싶던 조조 영화도 보고 친구와 브런치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모든 걸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퇴사 후 쉬는 시간은 잠시... 생각보다 빨리 번역일을 하게 되어 그렇게 부러워하던 디지털 노마드 프리랜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프리랜서. 결코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언제 의뢰 올지 모르는 번역일, 마감을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죽어도 지켜야 하는 마감 등. 프리랜서 생활이 전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제는 회사 다닐 때와는 다른 형태로 시간을 컨트롤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물론, 번역일이 겹칠 땐 마감을 하루 연장 가능한지 묻기도 하고, 번역 마감을 하자마자 연이어 오는 번역을 고사한 적도 있다. 며칠 연이어 10시간씩 번역을 하고 몸에 탈이 나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수많은 고민을 하고 고사를 했고, 플랫폼에 올라오는 번역 지원을 할까 고민하다가 어느새 누군가로 선정되었다는 걸 보고선 나의 무의미한 고민에 어이없어하다가, 잘된 일이라며 안도하는 내 마음의 갈등을 고스란히 마주했다.
며칠 번역으로 고생을 하고 나면, 뒤탈이 꼭 생긴다. 그러면 며칠은 늘어지게 쉬고 그동안 밀린 집안일이며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 어느새 생활은 엉망이 된다. 해야 하는 과제도 못하고, 책도 못 읽고, 이렇게 글도 못 쓰고 다시 루틴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이 걸린다. 그리고, 원래의 루틴이 생겼다가도 또 번역에 허우적거리고 나면 또다시 반복. 번역. 개인사 엉망. 다시 바로잡기.
들어오는 번역을 거절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리랜서는 알 거다. 언제 번역의뢰가 들어올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그 번역을 하면서 중요하게 챙겼어야 했던 공부를 챙기지 못했고, 아카데미 과제를 못해 선생님께 한 주 뒤에 제출해도 되냐는 문의를 조심스럽게 드리고. 그리고, 난 중요한 시험을 코 앞에 두고도 번역을 해야 했다. 그 전날까지 번역을 하고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몸살인지 목도 칼칼하고 몸이 무거웠다. 시험 치러 가면서 공부를 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고 시험을 치르고 나오곤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 자신이 싫었고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게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너무나도 다그쳤다. 그 기분이 어떤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아.....
그리고, 이 생활을 청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프리랜서가 아닌 반프리랜서가 되기로. 사실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은 번역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게을러서였다. 시간이 없어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시간이 많아도 못하는 사람은 못하고, 시간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짬을 내서 한다. 번역 하나 끝내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며칠을 쉬고 놀고... 다 나의 변명에 불과했다.
시험이라는 터닝포인트로 반프리랜서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난주 공유오피스를 다녀와 한 달 계약을 했다. 7월 중순이면 아들 방학이라 아들 방학이 끝나면 시작할까 고민하다, 아니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주말에 한 달 사용료를 입금했다. 주말에 무리를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 걱정이었다. 마치 월요일 회사를 가야 하는 것처럼 컨디션을 걱정하고 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아들은 지금 막바지 기말고사인데) 일요일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까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가야 한다는 생각에 움직였는데 움직이니 컨디션이 괜찮았다. 아마 내가 공유오피스를 끊지 않았다면 난 오늘 아들을 학교에 태워다 주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직장인도 아닌데 이렇게 출근 비슷한 걸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선 자리를 청소하고 바로 앞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한잔 사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밀린 과제를 하고, 스터디를 하고, 독서를 했다. 원래 목표는 9시 출근 3시 퇴근이 목표였는데(점심시간 따로 없이 6시간 근무) 오늘은 청소하느라 1시간 정도를 허비했고 4시에는 한 업체와 인터뷰가 있어 인터뷰를 끝내고 4시 40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유오피스를 끊을 때 주위 사람들은 집에 혼자 있는데 굳이 거길 갈 필요가 있을까 했다. 하지만 집에 있다 보면 몇 시간 하다 드러눕고 퍼지기 일쑤다. 쉬는 시간에 짬짬이 집안일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나 공부량이든 작업량이든 그리고 양뿐만 아니라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일과 공부는 공유오피스에서 그리고 집에서는 가능한 쉬고 집안일만 하는 걸로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뭐, 이것도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된다. 내 스타일에 맞는 걸 찾으려면 직접 해 봐야 한다. 그리고, 공유오피스를 선택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 사람들은 집에서 일을 하면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원이 아니니 재택이라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한다고 떠벌리지 않는 한 집에서 노는 줄 안다. 연락이 뜸하면 뭐 하냐고 연락이 없냐고 하고, 집안일로 인한 은행업무나 기타 일이 생겼을 때 직장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연히 그 일은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다름 아닌 나부터가 그랬다. 이 모든 걸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공유오피스였다.
공유오피스를 물색해 보면서 참 좋은 곳이 많았다. 집과는 멀다는 단점이 있지만 굳이 이동해도 가 볼만한 곳. 하지만 금액이 상당했다. 벌이가 좀 더 좋아지면 그곳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하지만 이곳은 집과 가까워 걸어 다닐 수 있고 비상주가 많아 거의 혼자 독점할 수 있고 대학교 앞이라 밥집, 카페 등이 많고 가끔 대학 캠퍼스를 산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하튼 오늘 하루는 뿌듯하게 보냈으며, 대한민국 어느 직장인보다 빠른 퇴근을 하며 집에서 마음 편안히 쉬었고 밀린 집안일을 조금 하며 하루를 이렇게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