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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ttleJune Jan 26. 2022

사용설명서

자신을 위한 사용설명서

오랜만에 필름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하루의 사진을 SNS에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는 것이 당연해진 이후로 언제 사용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금 들여다보니 어떻게 사용했는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숫자와 알 수 없는 버튼이 눈앞에서 아른거립니다. 친절한 사용설명서는 없어진 지 오래되어 구글에서 찾아보기로 합니다. 다행히도 pdf로 정리된 한글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책상에 노트북을 얹어놓고 천천히 읽어봅니다. 하나, 둘 떠오르기도 하고 새로운 기능을 알아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로봇 장난감과 고무동력기를 만들 때면 항상 설명서를 따라 만들지 않아 부품이 남거나 비행기가 곤두박질치곤 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사용설명서 없이 물건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임의로 판단하고 사용하는 것은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동반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설명서를 찾는 30분을 아끼고자 이리저리 열어보다 망가뜨린 물건만 떠올려도 현기증이 몰려옵니다.



결혼한 후에는 대부분의 가구는 직접 조립합니다. 가구가 무겁거나 공구가 위험한 탓도 있지만 아내는 설명서를 잘 읽는 사람이 아닙니다. 직접 경험하며 사용방법을 익혀나가거나 복잡하지 않은 물건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애플 워치를 구매한 아내에게 잘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 기능을 주로 사용하는지 물었습니다. 광고에서 강조하던 심전도 앱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 물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명확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나는 그 기능이 지금 필요하지 않은데?"

필름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하루 종일 돌았습니다. 카메라의 기능과 사용방법도 나가기 전에 모두 익혔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너무나도 많았고 어딘가 어설픈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현상 맡긴 필름을 찾아와 한 장씩 들여다보며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빛 조절에 실패하여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사진, 누렇게 퍼렇게 뜬 사진,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을 보니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필름 카메라를 놓지 않고 열심히 찍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사진이었습니다. 



분명 실수하지 않기 위해 설명서를 읽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매번 모두 알아야 하고 전문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그에 필요한 기능은 잘 알고 있는지 아는 것은 물건의 사용설명서가 아닌 나 자신의 사용설명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의 짧고 명확한 대답이 이해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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