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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Dec 28. 2022

내 입을 통해 세상으로 튀어나온 말

: 살아 움직이는 말. 꽃을 피우는 말.

 잊고 있었던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365일 많고 많은 날들 중에 하필 이런 날을 골랐다.

 새벽부터 시작된 진눈깨비는 그칠 줄 몰랐고, 날씨 앱에서 확인한 우리 동네 기온은 영하 1~2도였다.

 내린 진눈깨비가 도로에 쌓이면서 녹고, 동시에 얼었다. 완벽한 빙판길이 만들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살금살금 걸어서 도착한 버스정류장 앞은 이미 난리통이었다.


 버스정류장 앞 긴 내리막길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그로 인해 도로의 흐름은 거의 정지된 상태였다. 뒤엉킨 자동차들과 레커차, 경찰차 틈새로 출근길 자동차들이 한 대씩 간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꽉 막힌 교통정체 속에서 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번의 신호가 더 바뀌고서야 사고현장이 겨우 수습되었다. 꼼짝 못 하던 차들이 그제야 조금씩 움직였다. 잠시 후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막길 아래쪽으로 1차선과 3차선에 또 다른 사고 현장들이 보였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버스는 정체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도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안간힘을 썼다는 건, 버스기사님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 씨! 아, 씨!

 나까지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져서, 내가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도로 상황을 살폈다.


 한바탕 난리틈을 비집고 아슬아슬하게 병원에 도착했다. 약 40분이 걸려 도착한 병원에서, 건강검진은 20여 분만에 끝났다. 어찌나 형식적으로 진행되던지 시력검사 중에는 검사판의 글씨가 작아서 안 보인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여기저기 짚어대는 간호사의 손을 내 눈이 미처 따라가질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정도다. 정확도보다는 수검 여부에 의의를 둔 건강검진을 마치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도로 상황은 아침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곧 버스가 도착했고, 잠시 후 집 앞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섰다. 내리는 문이 이제 막 열리는 순간이었다. 앞쪽에서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히 가세요~!"

 버스를 떠나는 승객들에게 기사님이 건네는 인사였다. 순간, 그 말투가 어찌나 다정하게 들리던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 고맙습니다!

 (참고로 필자는 이런 경우, 마음은 굴뚝같으나 부끄러워서 대답을 잘 못하는 편이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오전 내내 조마조마했던 마음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분명, 조금 전 들은 기사님의 말 때문이었다.

 별 거 아닌 말 한마디에 마음이 이렇게 말랑말랑해지다니. '별 거'인 말이 분명했다. 진심으로 내가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길 바라주는 마음을 담은 말.

 

 말에 힘이 있다고 믿게 된 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1학년 어느 날, 하굣길에서 같은 반 친구에게 내가 건넨 마지막 말은,

 "가다가 코나 깨져라."

 결코 진심이 아닌, 농담이었다. 장난 삼아 던진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 등굣길에 학교 언덕을 오르던 친구는, 누군가를 학교 앞에 데려다주고서 돌아 내려가던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는 바람에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큰 위험은 피했지만, 무릎이 깨졌다.

 살면서 처음으로 '말'이 두려워지는 순간이었다.

 내 입을 통해 세상으로 튀어나온 말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의 힘'이란 걸 생각하게 되었다.


 2016년 12월 어느 날, 마지막 근무지에서 철딱서니 없는 후배이자 동료의 퇴직을 응원해 주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내뱉었다.

 "5년 후에 아직 작가 등단을 못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라도,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구나 생각하고 응원해 주세요."

 6년을 허송세월 흘려보내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점지하는 말이었다.

 이놈의 주둥이!

 차라리, 5년 후에는 꼭 좋은 작가가 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할 것이지.


 물론 안다.

 그 모든 일이 정말 내 '말' 때문이었겠나. 지나고 보니 그렇다는 거지. 우연의 일치였겠지.

 어디 세상 일이 '말'하나에 좌지우지될 일인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말의 힘을 믿는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으로 튀어나온 살아있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말은 당장 어딘가에서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어떤 말은 땅속에 심긴 씨앗처럼 숨어 있다가 언제고 그 모습을 온 세상에 드러낼지도 모른다. 말썽을 일으킨 말들을 거꾸로 추적해서 누구 입에서 비롯된 말인지 책임을 묻는다면, 나는 과연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싱겁지 않은 상상을 한다.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년 8개월 동안 팔려갔던 내 시간이 돌아왔다. 하던 '딴짓'을 완전히 멈추고, 내가 당초 가고자 했던 길 앞에 다시 섰다. 조금 멀리 돌아왔다. 이 시점에서 내 주둥이를 다시 한번 놀려본다.

 3년 안에 꼭 해낼 거라고. 온전히 글을 써서 밥벌이하겠다고. 꼭 좋은 작가가 되겠다고. 언젠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될 거라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향해서도 진심을 담아 나불댄다.

 2023년은 당신에게 참 좋은 해가 되길 바랍니다. 가끔은 어떤 이유로 슬픈 순간들도 있겠지만 그보다 행복한 시간들이 훨씬 더 많은 한 해, 2022년보다 조금 더 건강해지고 사랑스러운 한 해이길 소망합니다.

 더불어 2023년에는 우리 입을 통해 세상에 튀어나온 말들에서 향기로운 꽃들이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Happy New Year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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