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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Apr 12. 2023

문장의 묘미

: 고슴도치의 우아함(뮈리엘 바르베리)/구멍(앤드루 포터)

 문장의 묘미를 처음 맛본 건,

 프랑스 작가 '뮈리엘 바르베리(Muriel Barbery)'가 쓴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던 중이었다.

 건물 수위(=관리인) 아줌마 '르네'가 생애 첫 미용실에 갔을 때의 장면이었는데, 이런 문장이었다.


 "미용이 우리를 이토록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나조차도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미 못생겼다고 말한 내 얼굴을 옥죄었던 검은 헬멧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못나지 않은 얼굴 주위에서 촐랑대는 가벼운 파도로 변해 있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P. 271)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 미쳤다! 

 머리카락을 '내 얼굴을 옥죄었던 검은 헬멧'이라 비유한 부분에서 한 번, 그 검은 헬멧이 미용을 한 후에 '촐랑대는 가벼운 파도로 변해 있었다'에서 한 번 더. 그야말로 찢었다!

 2011년이 끝나가던 겨울, 이 문장을 발견하고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후로 재치 있는 표현의 문장들을 찾는 재미에 빠졌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에서의 "라이방이 라이방을 벗으며 말했다"라든가,


 ✽ 라이방: 안경과 선글라스를 만드는 이탈리아 기업 '레이벤(Ray-ban)'에서 만든 선글라스의 하나로, 그 디자인이 유명하다. 80년대 택시나 버스 기사님들이 쓰던 선글라스 모양을 떠올리면 비슷하다. 소설 속에서 '라이방을 쓰고 있는 남자'를 '라이방'이라 일컬었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풍경의 쓸모⌟에서 차창 밖의 풍경,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오는 버스 밖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수도와 지방의 이음매는 무성의하게 시침질해 놓은 옷감처럼 거칠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라던가,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수록된 ⌜비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서 아내를 잃은 인물의 슬픔을 "정미가 죽은 뒤로 마음의 가장자리는 매 순간 조금씩 시간에 쓸려 과거로 떨어지고 있었다."라는 문장이라던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들 앞에서 나는 희열을 느꼈다. 문장의 묘미였다. 그런 문장들을 흠모했다.



 두 번째 문장의 묘미를 알게 된 건,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단편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게 되면서였다. 이 단편소설집에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여 총 8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는데, 특별히 ⌜구멍⌟과 ⌜강가의 개⌟를 좋아한다.


 이 소설들의 문장은 '표현'이 멋있다기보다 이야기 속에서 '문장'이 해야 할 일을 소름 끼치게 잘 보여준다. 평범하고 담백한 문장 하나가 이야기 속에서 가리키는 지점이 기가 막히게 정확하고 소름 끼친다. 문장에서 소설의 구성이 이미 만들어지는 느낌이랄까.


 소설 ⌜구멍⌟의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구멍은 탈 워커네 집 차고로 이어지는 진입로 끄트머리에 있었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지만, 십이 년 전 여름, 탈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

 단 두 문장으로 소설의 핵심 사건을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자를(적어도 내 경우에는) 확 끌어당긴다. 호기심과 집중력을 발동시킨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문장 이상의 것을 이야기한다. 곧이곧대로 쓰지 않아서,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일종의 '돌려차기' 같은 느낌이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주 동안, 어머니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나를 안아주곤 했다."


 ✽ 소설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읽어보시면 알게 됩니다. (웃음)



 이런 소설은 어떻게 쓰는 걸까.

 문장의 묘미를 찾으면 찾을수록 '나도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 '나도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다.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좌절도 커진다. 


 2023년 봄, 나는 눈만 뜨면 단편소설들을 읽고, 또 읽고, 읽는다.

 요즘 내가 책을 읽는 행태를 생각하면, 초등학교 시절에 마취시킨 개구리를 실험실 테이블 위에 눕혀 놓고, 배를 갈라서 이것이 심장, 이것이 허파, 이것이 내장... 하며 해부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뜯어본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확하게 알려주는 선생님이 없어서 배를 갈라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얼렁뚱땅 '다 봤다' 하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자꾸 뭔가를 더 찾고 싶어, 다시 들여다본다. 그럴수록 점점 더 '와... 이런 소설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걸까.' 좌절한다. 

 그런 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아무나'에 속한 사람인 것 같아서, 도무지 나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소설들을 읽고 또 읽고 들여다보는 일이 쓸데없는 짓 같기도 하다. 자주 조바심이 난다. 그러면서도 이 쓸데없을지 모를 일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요즘이 행복하다. 


 지난가을, 길에서 주운 자귀나무 씨앗을 심었다. 겨울이 지나고, 목련, 개나리, 산수유, 벚꽃이 다 피고 지도록 자귀나무 씨앗의 새싹은 올라오지 않았다. 새싹이 올라오거나 말거나 매일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흙뿐인 화분에 물을 준다. 자귀나무 씨앗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봉숭아 때문이다.

  작년 여름 심어놓은 봉숭아 씨앗에서 싹이 올라올 기미가 영 보이지 않자, 포기하고 화분을 신발장 안에 그대로 넣어두었다. 화분을 다시 꺼낸 건, 올 1월에 분양받아 온 다육이를 심기 위해서였다. 흙 안에 봉숭아 씨앗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육이를 옮겨 심고서 두 달이 지났을 무렵, 다육이 사이로 생소하게 생긴 새싹이 올라왔다. 하나, 둘, 셋, 자꾸 올라왔다. 그제야 봉숭아 씨앗이 생각났다. 새싹들을 새로운 화분에 옮겨주었다. 씨앗을 심은 사람도 잊고 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올라온 새싹이 고마웠다. 

 

 언젠가 내가 그런 좋은 소설들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것 역시 봉숭아 덕분일 거다.

 

무럭무럭 자라 올라오는 봉숭아 새싹입니다.


 ✽ 자귀나무는 봄이 다 지나도록 여전히 겨울을 난다. 봄꽃이 피고 지는 동안 메마른 가지만 앙상하다가, 봄이 다 지나갈 무렵에서야 늦은 잎을 낸다. 그리고 초여름이 되어 꽃눈을 올리고, 한여름 내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향기가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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