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35년 전 '서쪽의 빛'이라는 이름의 국민학교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다. 그저 35년 전 내가 직접 목격했던 그날의 일에 관한 것이다. 다만, 그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종종 떠오르곤 한다.
35년 전 남국이는 '서쪽의 빛' 국민학교 3학년 2반이었던 나, 내 짝꿍이었다. 국민학교, 그래, 이 이야기부터 짚고 넘어가자. '국민학교'는 국민교육을 담당하는 기초교육기관이란 의미로, 지금의 '초등학교', 초등교육기관을 말한다. 옛날 우리나라의 '소학교'를, 일본이 1941년에 '국민학교'로 바꿔놓았고, 1995년 8월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일제 잔재 청산이 이뤄질 때에 '국민학교'의 명칭 변경이 추진되면서, 1996년부터 '초등학교'가 되었다. 그러니까 국민학교를 입학해, 국민학교를 다니고, 국민학교를 졸업했던 나는, 1996년 고등학교 시절에 '국민학교'와 '초등학교' 명칭의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이름뿐인 줄 알았던 '국민'에서 '초등'으로의 변화는 우리들에게 뜻밖의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는 그저 이름이 낯설어 '국민학교'가 먼저 툭 튀어나왔다가, 아차! 하고 '초등학교'로 수정하면 그만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국민학교 졸업생들과 초등학교 졸업생들 사이에 어떤 벽 같은 것이 생겼는데, 그것은 세대 차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국민학교'란 단어를 언급한다는 것 혹은 그런 단어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이 많이 먹음'의 증거가 되었다. 어쨌든. 남국이는 '서쪽의 빛' 국민학교 3학년 2반이었던 나, 내 짝꿍이었다.
남국이와 내가 짝꿍이었단 얘기가, 둘이 뜻이 맞는 친한 친구였단 의미는 아니다. 그저 남국이와 나는 책상을 나란히 붙여 앉게 된 사이라는 의미에서 짝꿍이었다. 아마도 남자, 여자 아이들의 성별을 나누고 키 순서대로 줄을 세웠겠지. 키가 작은 아이들부터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짝을 지어 교실의 앞줄부터 앉혔겠지. 그래서 남국이와 나는 첫 번째 줄, 교탁 바로 앞에 앉았다. 교탁은 교실의 정중앙에 놓여 있었으니, 2개씩 짝을 이룬 책상이 교탁의 정면 앞에 위치하려면 총 다섯 개의 분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왼쪽에서부터 앉혔든 오른쪽에서부터 앉혔든, 남국이와 나는 각자의 성별에서 키가 작은 순서로 3번째 사람들이었으리라.
남국이는 작은 키만큼 마음이 작았다. 소심했다. 담력도 작았다. 공부를 못했고, 친한 친구들과 가끔 장난을 심하게 치다가 사고를 쳤다. 종종 콧물자국이 보였고, 손톱의 떼도 보였다. 어딘가 짠했다. 3학년 2반의 담임이었던 명자 선생님은 소심하고, 공부 못하고, 사고 치는 아이들을 싫어했다. 남국이를 싫어했다. 대신 공부 잘하는 아이, 부모님이 부자이거나 사회적으로 한가닥 하거나 하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학부모가 건네는 돈도 좋아했다. 그래서 남국이를 예뻐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어딘가 짠했다.
남국이와 명자 선생님. 이 두 사람이 그날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날, 그러니까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날은 3학년 2반 담임선생님이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명자 선생님은 교탁 앞에 서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특별히 누군가를 노려본 것은 아니고, 눈앞에 앉아 있는 60여 명(그때는 그랬다, 한 학급 당 학생 수가 많았다)을 골고루 노려보았을 것이다. 혹은 3학년 2반 학생 한 명 한 명을 빠르게 번갈아 가며 노려보았거나. 그런데 명자 선생님이 우리를 노려본 이유가 뭐였더라. 시험성적이 좋지 않았나.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명자 선생님은 단단히 화가 났다. 아이들은 쥐 죽은 듯이 앉아 명자 선생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감히 엉덩이를 들썩이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엄숙함 속에서 숨소리마저 줄였다. 명자 선생님이 들고 있던 매로 교탁을 탁! 탁! 두어 번 내리쳤다. 뒤이어 "……(뭐라고 뭐라고)……어?!" "어?!" 하는 소리를 몇 번 덧붙였던 것 같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교실 안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괴로웠다.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였다. 남국이. 그러니까 어딘가 짠했던 남국이가. 큭큭. 화가 난 명자 선생님 앞에서 잔뜩 숨죽이고 있던 남국이가. 큭큭큭. 남국이가 그랬다. 남국이었다.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짝꿍에게서 이런 소리가 삐져나왔다.
뾰오오~~ 오~옹!
가늘고, 길고, 몹시도 조심스러운 소심한 방귀. 남국이의 방귀. 극도로 조여진 항문 근육 사이를 어쩔 수 없이 삐져나오던 방귀. 조심스럽게 침묵 속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실바람 같았던 소리. 그 소리마저 어쩐지 짠했다. 남국이는 참지 못했다. 방귀가 새어 나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침묵보다 더 깊은 정적이 흘렀다. 고요하고 괴괴한 찰나. 뇌의 회로들이 일시정지. 웃어야 할지 참아야 할지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우왕좌왕. 잠시 후, 큭큭. 큭큭큭. 큭큭큭큭.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남국이는 새어 나오는 방귀를 참지 못했고, 아이들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명자 선생님도 그랬다. 명자 선생님의 험상궂은 인상이 풀리더니 그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남국이의 방귀가. 남국이가. 명자 선생님의 화를 단번에 녹여버리고, 공포에 숨죽여 있던 3학년 2반 친구들을 해방시켰다.
남국이가 의도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남국이로부터 시작되어 3학년 2반 교실에 울려 퍼진 그 유쾌하고 리드미컬한 그날의 소리는,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종종 떠오르곤 한다. 그날 남국이의 방귀가 3학년 2반에 일으킨 파장.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우리들의 숨통이 단번에 트일 때 느꼈던 전율이랄까 쾌감이랄까. 그 강렬한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종류의 해방감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살아오는 동안 어느 날이고 문득문득 느닷없이 남국이의 방귀를 생각한다. 가끔 삶의 이런저런 문제들 앞에서 움츠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옆에서 남국이의 방귀를 뀌어주면 좋겠다 상상하면서. 혹은 내가 그런 방귀를 뀌거나. 삶의 긴장이 훅! 하고 풀어지는 유쾌하고 리드미컬한 방귀를. 그래서 키득키득 한바탕 웃어넘길 수 있는 한 줄기 실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오기를. 무거운 감정들을 툭툭 털어낼 수 있는 힘이 찾아와 준다면. 하고.
그날 이후 남국이는 3학년 2반의 유명인사였다. 좋은 의미에서 그랬다. 한동안 아이들은 남국이의 방귀 사건을 회자했고, 남국이를 놀렸고, 아이들도 남국이도 다 같이 웃었다. 그리고 3학년 2반을 끝으로 남국이는 내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세월이 우리를 그렇게 멀리 떨어뜨렸다. 어쩌면 살면서 한 번쯤 마주쳤을까? 나는 남국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남국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나는 그저 3학년 2반의 어린 남국이. 내 평생에 잊지 못할 멋진 방귀를 뀌었던, 어딘가 짠했던 남국이만을 기억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국이의 방귀를.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