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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른씨 Apr 27. 2021

직장에서 만난 도른씨 Ep.5

'자격지심'에 대하여

자격지심은 가히 '양날의 검'인 감정이다. 어떤 이는 자격지심을 자극제로 삼아 스스로 부족한 역량을 키우고 성장하는 반면, '도른' 이는 자격지심을 남 탓으로 하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리며 본인의 감정을 위안 삼는다. 자신이 올라갈 역량이 없고 키울 생각도 없으니 남을 끌어내리는 '남탓충'이 되는 것이다. 곱씹을수록 씁쓸하기만 한 나의 첫 직장, 첫 사수는 '자격지심의 끝판왕'이었다. 상당히 좋은 평가로 입사를 하게 되어 팀장님은 '수많은 면접자들을 만나봤지만 이 친구가 역대급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고,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고서는 사수 대신 나에게 큰 기획 건을 맡기며 신임하셨다.


팀장님이 사수 대신 나를 찾는 일이 많아지자, 어느 날부터 사수는 내가 쓰는 모든 메일에 본인을 참조로 넣고, 모든 기획안을 공유하라 강요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말도 안 되는 걸로 혼내기 시작했다. 정말 사소한 일례로, 메일 하단에 '000 드림'이 아니라 '000 Dream'을 쓰던 그녀가 나에게 메일에 가벼워 보이게 왜 웃는 표정 (:D)을 2번 쓰냐고 혼냈던 건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온다. 우주의 먼지같이 사소한 것도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서 깎아내리고 혼내며 마무리 멘트는 항상 '좋은 대학 나와봤자 별거 없네'였다.


그렇다, 그녀는 본인의 '학벌'에 자격지심이 있는 여자였다. 팀장님이 본인보다 나를 신임하는 게 '학벌'때문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내 학벌이 별게 아니라는 식으로 깎아내리며 자기 위안을 삼아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자격지심은 나날이 심해졌고. 술에 취하면 휴일 및 시간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전화해 각종 폭언을 퍼붓는 지경에 이르렀다. '능력도 없는 게 학벌 믿고 까부는 거 재수 없어', '입사하는 그 순간부터 너 생긴 거조차 마음에 안 들었어', '너랑 나는 띠 궁합부터도 최악이야', '네가 보이기만 해도 짜증 나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 등 직장 동료 간에 결코 나와서는 안되는 표현을 듣고 나면 내 감정도 너덜너덜해졌다.


매일 나에 대한 평가절하 및 비하를 듣고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자존감이 조금씩 떨어져갔다.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더 병들기 전에 그녀보다 역량 있는 내가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머지않아 이루어냈다. 언제 어떻게 퇴사를 말할까 고민하던 중, 그날도 어김없이 그녀의 '깎아내리기'가 시작되었다. 볼펜 소리와 내 구두 소리가 거슬려서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다짜고짜 회의실로 따라 들어오라는 그녀의 말에 '오늘이 날이구나' 생각했고 꾹꾹 참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저 볼일 없을 테니 걱정 마시고 남 탓 좀 그만하시고 그 시간에 본인 능력이나 키우시라고. 그러고는 곧장 팀장님께 가서 퇴사 면담을 하고 연차를 쓴 후 사무실을 나왔다. 1년 6개월 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쾌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후,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끝까지 마무리하고 떠나는 그날까지 그녀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내가 건방지게 자기를 무시해서 선임으로써 한마디 한 것을 내가 대들고 퇴사로 협박했다고. 억울하지도 해명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진실을 아는 사람을 알 테고, 무엇보다 어차피 떠날 곳이니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가 나로 인해 자격지심이 생겼을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속이 터진다. 그 사람의 감정을 해결해 줄 수도, 그 사람이 빛나도록 내가 내 업무를 엉망으로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자격지심'을 가진 도른씨들이, 스스로 감정을 잘 조절하고 긍정적인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길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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