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죄와 벌'일 것이다. 소설을 세 번이나 읽었는데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를 오해했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스비드리가일로프였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똑같이 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을 선택했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새 생명을 얻었다.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스비드리가일로프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의 감각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았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니체가 추구하는 초인(Ubermensch) 또는 강한 인간을 대표한다. (이 초인 사상은 나치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악한 곳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악을 과감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악하지 못한 자는 나약한 희생자일 뿐이다. 세상은 의미가 없고 방향성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중요한 것은 즐거움과 만족뿐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신의 이런 저속함이 '타고난 성향'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행동했다. 세상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느낌과 즐거움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유일하고 중요한 것은 '나'뿐이었다. 그는 15살의 벙어리 소녀를 겁탈하였고, 이 소녀는 수치심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을 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소냐는 원인 없이 세상에 모든 고통을 받는다. 소냐의 아버지는 구제불능처럼 살다가 말에 치여 죽었다. 어머니는 폐병으로 고통받다가 길거리에서 춤추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길거리의 창녀가 된다. 소냐는 어린 이복 동생들을 부양할 힘이 없었다. 그런 소냐에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거금을 주며 어린 생명들을 구원하고, 소냐를 불행에서 구해냈다. (독자로써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감사함마저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라스콜리니코프와 두냐에게 자신이 잘못을 고치고 새롭게 태어났다고 유인하는 술책이었다.
허무주의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를 사랑했다. 두냐를 유인해서 자신의 방으로 끌어들리고 문을 잠갔다. 두냐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향해 총을 쐈다. 총알이 빗나가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를 끌어안았다. 삶의 끈을 놓아버린 듯 절망하는 두냐의 눈 보며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조차 깨달았다. 그도 완전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인간성으로부터 고립될 수 없었다. 한 발 남아 있는 권총을 챙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부둣가에서 길을 멈추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메리카'로 간다며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자살은 그가 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일이었다. 그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삶의 방식은 부정당했다. 그것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이다.
라스콜리니코프
라스콜리니코프는 위대한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두뇌는 명석했지만, 평생 하급관리로 살아가게 될 미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처럼 강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전당포 노파를 죽였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리자베타 마저 죽였다. 리자베타는 소냐의 친구로 이복 자매인 노파에게 학대당하며 중노동을 하고 불량배들에게 겁탈당한 백치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와 리자베타를 동시에 죽였다. 계획에는 없던 리자베타를 죽임으로써 그의 살인은 정당해질 수 있는 여지가 없어졌다. 스비드리가일로프였다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즉시 괴로움에 빠지며 자살을 고민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찾아갔다. 소냐는 자신의 친구인 리자베타를 죽인 라스콜리니코프를 끌어안으며 당신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신이 죄를 저지른 대지에 엎드려 입맞춤하고 고통으로 죗값을 치르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죄를 자백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 유형소에서 죄수생활을 1년쯤 한 어느 날, 그는 창문 밖에서 서성이는 소냐를 보았다. 그는 갑자기 가슴을 무언가로 찔린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소냐의 무릎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단 한번도 행복한적이 없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저지를 죄를 뉘우치고 구원받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의지'를 강조하는 차가운 두뇌를 대표한다. 세상이 세운 도덕적 기준을 뛰어넘을 수 있는 특별한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15살의 벙어리 소녀를 겁탈하였다. 그는 소심한 행동, 도덕, 법이 자신의 의지를 막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라스콜리니코프도 이론적으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처럼 강해지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노파를 살해했다. '자기 의지'를 과감히 실행하였지만 계획에 없던 리자베타를 죽였다. 그는 모순덩어리다. 살인을 했지만 자신은 굶으면서 마르멜라도바에게 장례식비를 자선하며 충동적으로 선을 행했다. 여동생인 두냐에게는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돕지 말라며 루진과의 결혼을 막았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불난 집에서 어린아이를 구했었다. 그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성이 있었다.
자살은 속죄인가 오만인가?
아메리카로 가야 할까? 시베리아로 가야 할까?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고통을 받으면 속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결과적으로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했다. 소냐는 '자기 의지'와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소냐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신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혼자 살 수 없음을 깨달은 후에도 '자기 의지'로 자살하였다. 그의 자살은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한 것일까? 세상을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또 다른 오만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반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을 사랑해준 어머니를 미치광이로 만들어서 죽게 하고도 자살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신이 아닌 인간이 주는 처벌을 받았다.
죄와 벌을 세번이나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했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봤다. 도스토옙스키는 '고통은 위대하다'고 말했지만 '어떤 위대한 일도 어린아이의 눈물 한방울을 흘리게 할 가치는 없다'고 말했다. 인간이 살아 갈 수 있으려면 의미를 찾아야 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영향을 받은 니체는 초인 사상을 말하며 '위대함'이야 말로 인간이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죽음에 가까워져 봤던 사람은 이 사실을 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는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다.
다음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첫 페이지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서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