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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칭 Aug 05. 2019

세종대왕은 건들면 안돼? 나랏말싸미의 도발

세종대왕과 한글창제라는 금기(?)의 소재에 겁없이 덤벼든 영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역사왜곡 논란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모두 빨아들였다. 영화를 다큐로 보는 진지한 시각이 문제인 걸까? 허용범위를 넘어선 상상력의 무리수일까? 한편의 영화가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다양한 탄생설이 있는 한글? 


영화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왕위 말 8년을 그려낸다. 숭유억불의 나라, 조선의 왕인 세종(송강호 분)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 창제에 매달렸으며 이 과정에서 신미(박해일 분)라는 승려의 조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설정이 주요 뼈대다. <나랏말싸미>는 다큐영화가 아니다. 당연히 조철현 감독(각본 및 각색 담당)의 상상력은 도발적이어도 된다. 신미가 한글창제에 참여한 기록이 없으며 훈민정음 반포 후 세종과 만났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일단 살짝 제쳐두기로 했다. 


승려인 신미는 한글 창제의 실무를 도맡은 인물로 영화 속에서 묘사된다. [사진 스틸컷]

그런데 영화 시작부터 이런 생각이 살짝 흔들린다. ‘나랏말싸미는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자막이 뜨면서다. 물론 세종대왕이 홀로 한글을 만들진 않았을 터. 하지만 ‘다양한 창제설’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가볍지 않다. 한글 창제 과정과 세종의 역할이 알려진 것과 매우 다를 수 있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훈민정음 창제에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었다’는 톤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


‘잔재미’ 잡고 ‘큰재미’ 놓쳐


불편함을 가라앉히고 집중한 영화의 초반 전개는 나쁘지 않다. 일본의 승려들은 세종을 찾아와  ‘조선은 불교를 버렸으니 정종이 약속한대로  대장경판을 일본에 넘겨달라’고 시위한다. 이때 소헌왕후(전미선 분)의 노력으로 해결사로 등장하는 신미 일행. 신미의 제자인 학조(탕준상 분)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속사포랩처럼 읊으며 일본 승려들을 압도하는 장면은 살짝 소름이 돋는다.


불심이 깊은 소헌왕후는 신미와 세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진 스틸컷]

영화 속 잔재미도 진지함과 무거움을 덜어내는 양념으론 충분했다. 궁궐에서 감금상태로 한글창제에 매달리는 승려들이 신미의 허락으로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장면이나, 묵언수행 중인 학열 스님이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찰진 호남 사투리로 열변을 토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묵언수행 중인 학열 스님은 찰진 호남 사투리로 웃음을 준다 [사진 스틸컷]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졌다. 세종-신하, 세종-신미의 갈등이 단조롭게 반복되다 보니 관객을 빨아당기는 흡입력이 현저하게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갈등이 고조되다 폭발 직전까지 갔다가 마침내 해소되는, 이야기 자체가 주는 극적(劇的)인 재미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영화 막판 시계를 자주 쳐다보며 엔딩 크레딧을 맞이할 것 같다. 


<신미>가 제목이었나?


영화의 제목을 <신미>로 지었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가 끝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아는 역사(한글창제)’를 재구성한 다소 밋밋한 이야기는 ‘모르는 인물(신미)’만 선명하게 했다. 세종은 흐릿해졌다. 이런 느낌은 관객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신미를 내세운 '불교영화'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조철현 감독은 입장문을 통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폄훼하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고 해명까지 했으니. 


한글 창제를 추진하는 세종대왕에게 신하들은 대놓고 대든다. [사진 스틸컷 ]

영화는 세종대왕을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성군으로 그린다. 이건 우리 상상 속 이미지랑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세종은 ‘이러시면 주상의 신하가 될 수 없다’는 대신들을 바라만 보는 나약한 군주로 묘사된다. 반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인물, 신미는  5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천재이면서 한글 창제의 실무를 홀로 도맡다시피한다. ‘주상은 왕의 탈을 쓴 거지요’라고 서슴없이 직언 하는 선이 굵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러니 세종은 흐릿해지고 신미는 도드라질 수밖에.  


역사영화, 상상력 한계는 어디까지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데에 사실과 다른 허구를 바탕으로 삼는 일은 어쩔 수 없고, 상상력의 작동이라는 측면에서 허구가 창작의 본질일 수도 있다. 역사의 줄기마저 허구로 지어내는 순간 그러한 창작이 심각한 역사 왜곡을 저지를 수 있음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의 아들인 안평과 수양(세조) 대군. 두 사람은 신미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 나온다. [사진 스틸컷]

한글문화연대가 <나랏말싸미>를 비판하며 낸 입장문의 일부다. 역사 영화에서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상상력을 풀어내는 톤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도발적 재해석은 비판받는 게 당연한가. <나랏말싸미>는 흥행과 상관없이 두고두고 회자될 영화가 될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쏟아낸 이런 질문들 때문이다.

와칭 방문해서 더 많은 리뷰보기 


제목   나랏말싸미 
감독   조철현   
출연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평점   IMDb 5.5  에디터 쫌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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