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그때 실수를 했고 다시는 실수할 수 없다.
제롬 파월은 또 틀려선 절대 안 됐다. 그러면 제롬 파월은 폴 볼커가 아니라 아서 번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폴 볼커는 1980년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설적인 연준 의장으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아서 번스는 1970년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역사상 최약체 연준 의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절대 아서 번스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제롬 파월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명예이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기록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제롬 파월은 경제학자가 아니다. 변호사로서 투자회사에서 일했다. 똑똑했고 그래서 백만 장자가 됐다. 그렇지만 제롬 파월의 열정은 돈이 아니라 명예였다. 제롬 파월은 워싱턴DC 토박이다. 늘 워싱턴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보면서 자랐다. 게다가 파월의 아버지 역시 공무원이었다. 고위 공무원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명예로운 공직으로 나가길 기대했다. 파월의 초기 경력은 공직이 아니라 민간 회사쪽으로 풀렸다. 덕분에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보다 부자가 됐지만 어딘가 부족했다.
제롬 파월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한 티 파티 운동을 비판하면서 대중적 주목을 얻었다. 파월은 공화당원이다. 그런데 공화당의 극단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아직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하기도 전이었다. 이때부터 파월은 트럼프주의의 대척점에 섰던 것이다. 제롬 파월은 연준 이사로 합류했다. 직전에 받았던 연봉에 비하면 무료 봉사나 다름 없었던 봉직이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제롬 파월을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임자인 자넷 옐런 의장은 연준 창설 이래 가장 존경 받는 의장이었다. 전임자인 밴 버냉키가 2008년 금융 위기를 극복하면서 연준을 재창조했다면 후임자인 자넷 옐런은 연준 구성원 모두의 존경을 받는 부드러운 리더쉽으로 연준을 강팀으로 만들었다. 트럼프가 자넷 옐런을 재지명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그저 오바마가 싫어서였다. 오바마가 지명한 자넷 옐런을 낙마시키는 것이 자신의 인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희미 쌍곡선으로 제롬 파월은 꿈꿨던 연준 의장 자리에 올랐지만 그래서 초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제롬 파월은 밴 버냉키처럼 존경 받은 경제학자도 자넷 옐런처럼 존경 받는 선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역시 제롬 파월을 자신이 쉽게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약체 연준 의장으로 여겼다. 실수였다. 제롬 파월은 트럼프 임기 내내 백악관과 불편한 사이였고 그 과정에서 연준 의장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얻었다.
2000년 2월 코로나 판데믹 때 보여준 제롬 파월의 카리스마는 연준이 완전고용과 경기부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제롬 파월은 제로 금리까지 순식간에 기준금리를 내렸고 양적완화로 시장의 유동성을 늘렸다. 코로나로 세계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막아낸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롬 파월은 영웅이었다. 특히나 증시가 춤을 췄다. 이지 머니 시대에 글로벌 증시는 축제 분위기였다.
제롬 파월의 결정적인 실수는 파티가 끝나기 전에 술잔을 치워야 하는 연준의 의무를 게을리한 점이었다. 제롬 파월은 인플레이션 신호를 놓쳤고 금리 인상 타이밍이 늦었다. 그 바람에 인플레이션은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시장은 연준이 물가 상승률을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연준에 대한 신뢰를 바닥을 쳤다. 파월은 1970년대 아서 번스처럼 무능한 연준 의장으로 낙인 찍힐 위기에 쳐했다. 명예가 가장 중요한 제롬 파월한텐 죽기보다 싫은 불명예였다.
2024년 8월 23일 잭슨홀 기조 연설에서 제롬 파월 연준의장은 연설을 “때가 왔다”는 말로 시작했다. 정확한 워딩은 이랬다. “고용시장은 식어가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분명하게 해소되고 있다. 정책을 조정할 때가 왔다.” 이제 연준 의장으로서 파월에게 남은 마지막 숙제는 하산이다. 인플레이션은 잡았다. 이제 경기 침체를 야기하지 않고 고용률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서서히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이것까지 해내면 파월은 위대해진다.
기준 금리를 인하할 때가 왔다면 파월에게는 2가지 선택지가 있다. 25bp 인하인 베이비 컷과 50bp 인하인 빅 컷이다. 그런데 9월 FOMC에서 자신이 빅컷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상당한 힌트를 줬다. 이 한 마디가 핵심이다. “노동시장의 추가적인 냉각을 원하지 않는다.”
파월은 시장이 빅 스텝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자칫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파월 의장은 고용 시장이 너무 빨리 냉각 되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 한 박자 빨리 빅 컷으로 대응할 생각인 것이다. 2021년 8월 잭슨홀 미팅에서의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재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년 전 같은 자리에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의 명백한 징후를 놓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파월 의장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뜨렸다가 금리 인상의 낭떠러지로 몰아넣었다. 파월 의장이 3년 전 실수를 만회할 방법은 선제적 빅컷 뿐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빅컷은 답이 아니다. 자칫하면 지난 3년 동안 사투 끝에 겨우 길들이는 데 성공한 인플레이션이라는 짐승을 다시 우리 밖으로 꺼내게 될 수도 있다. 여기에도 파월 의장이라는 인간 변수가 존재한다. 파월 의장은 2021년 8월 잭슨홀 연설에서 “중앙은행의 정책은 일시적 인플레이션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trasitory inflation 발언이다.
당시 2021년 3월 물가 상승률은 2.6%였다. 연준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2%대 물가 상승률의 밴드 안에 있었다. 2021년 4월 4.1%로 더블이 됐다. 5월엔 5%가 됐다. 6월엔 5.4%가 됐다. 그런데 7월과 8월엔 상승세를 멈추고 오히려 소폭 하락했다. 이 2021년 7월과 8월의 인플레이션 수치가 바로 노이즈였다.
그런데 파월 의장은 2021년 8월 잭슨홀 미팅에서 노이즈에 근거해서 일시적 인플레이션이라고 오판해버렸던 것이다. 3년이 지난 지금 2024년 9월의 고용지표도 마찬가지다. 이미 6월과 7월에 고용시장이 냉각되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통계에 노이즈가 낄 가능성도 있다. 3년 전 파월 의장이었다면 노이즈를 시그널로 오판할 수 있었다. 파월 의장은 데이터에 집착하는 걸로 유명하다. 매달 FOMC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데이터에 근거해서 판단하겠다”일 정도다.
3년 전 파월의 데이터 집착증은 오판의 원인이 됐다. 노이즈도 데이터는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1년의 파월과 2024년의 파월은 다를 수밖에 없다. 2024년의 파월은 노이즈 필터링을 장착한 파월이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 의장이 2024년 9월부터 금리 인하를 시작한다면 4년 6개월만의 피봇팅이 된다. 파월 의장이 마지막으로 금리를 인하한 시기는 2020년 3월이었다. 그렇지만 경제에서 과거보다 더 중요한 건 언제나 미래다. FOMC가 열리는 9월 18일은 11월 5일로 예정된 미국 대선으로부터 불과 48일 전이다. 숨 쉬는 것조차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민감한 시기다. 파월 의장은 금리 인하 여부는 절대 절대 정치적 결정 사안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잭슨홀 피봇팅은 이미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대선 전 금리 인하가 여당인 민주당에 도움이 될 거란 건 삼척동자도 안다. 당장 금리인하 효과가 실물 경기에서 나타나지 않아도 상관 없다. 주식 시장이 과대 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가호호 모두가 주식 투자를 하는 미국의 경우 금리 인하 효과는 가계 경제에 즉시 반영되고 당연히 표심에도 영향을 준다.
게다가 잭슨홀 피봇팅은 사실상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의미다. 인플레이션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인기가 없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어느 나라나 물가를 못 잡은 대통령이 인기가 높을 수는 없다. 미국은 한 술 더 뜬다. 소비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카머라 해리스 부통령한테 바통을 넘겼지만 대선을 앞두고 나온 파월 의장의 인플레이션 승리 선언은 분명 해리스 부통령한테 호재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는 연준은 대선 이후에 금리 인하를 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었다. 파월 의장이 트럼프 후보의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바꿔 말하면 연준에서 트럼프 재선을 가장 바라지 않을 사람도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잭슨홀 피봇팅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제롬 파월 의장이 2021년 상반기의 인플레이션 시그널을 놓쳤던 것도 따지고보면 정치적 환경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1월 임기를 시작했다. 바이든은 재무 장관으로 재닛 옐런을 낙점했다. 선임 연준 의장이 재무부 장관으로서 파월과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이다. 문제는 재정 정책과 금리 정책은 너무 케미가 좋으면 자칫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임 행정부 재무부 장관 재닛 옐런이 당연히 재정 확장을 추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당연했다. 재정 확장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
그런데 파월 의장은 2021년 상반기의 인플레이션 징후를 애써 무시했다. 2021년 8월 잭슨홀에선 일시적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로 논의 자체를 일축해버렸다. 그렇게 파월 의장이 지체하는 사이에 바이든 대통령과 재닛 옐런 장관은 새로운 뉴딜 정책을 입안할 수 있었다. 처음엔 뉴딜이라고 불렸지만 나중엔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는 인프라 재정 정책이다.
표현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이지만 실제로는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요소들 투성이였다. 기업들의 리쇼어링을 유도하려면 미국 영토 안에 공장을 지었을 때 재정 지원과 세제 혜택을 줘야만 한다. 그런 거래 조건으로 들어온 기업들은 미국에 투자를 하게 되고 결국 시중에 돈이 풀리게 된다.
그럼 다시 인플레이션이 자극된다. 덕분에 삼성전자와 TSMC 모두 몇 곱절 비싼 비용으로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만 했다. 제롬 파월 의장이 인플레이션 시그널을 놓친 것은 못 본 걸 수도 있지만 안 본 걸수도 있다는 얘기다.
덕분에 연준은 한 템포 늦게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개전했다. 그래서 밤샘 야근을 해야만 했다. 2020년 3월부터 2023년 7월까지 줄기차기 기준 금리를 인상했다. 2022년 6월부터 2022년 11월까지는 무려 75bp 자이언트 스텝을 4차례나 연거푸 단행했다. 2022년 12월 기준 금리는 22년 만에 가장 높은 기준 금리 수준인 5.25%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그야말로 풀악셀을 밟은 것이다.
난폭 운전을 하는 파월 버스 운전 기사한테 몸을 맡긴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당탕탕 제롬 파월 덕분에 지난 3년 동안 세계 경제는 사실상 심각한 긴축 앓이를 해야만 했다. 심지어 파월 의장은 2023년 12월 금리 인상을 끝났다고 선언하고 나서도 금리 인하는 하지 않았다.
덕분에 시장은 2024년 상반기에 극심한 조울증을 겪어야만 했다. FOMC 때마다 금리 인하를 기대하며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가 파월의 등만 바라보면서 실망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파월 의장은 2024년 7월까지는 말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 미스테이크를 다시 저지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제롬 파월이 결국 2024년 8월 잭슨홀에서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이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최대 관심사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완전 고용이다. 흔히 중앙은행의 목표는 인플레이션 방어에 있다고 알고 있다. 벤 버냉키 연준의장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목표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됐다. 인플레이션 방어와 완전 고용 달성이다. 두 가지 목표는 상반되지만 그래서 연준이 균형만 잘 잡으면 황금율을 찾을 수도 있다. 물가도 안 오르고 일자리도 넘쳐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골디락스 경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걸 달성한 연준 의장이 벤 버냉키와 재닛 옐런이었다. 그런 재닛 옐런의 연임을 막고 제롬 파월을 연준 의장에 앉힌 건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제롬 파월은 1980년대 전설적인 연준의장인 폴 볼커처럼 인플레이션과 싸워 이긴 연준 의장이 됐다. 이제는 과거의 골디락스 경제를 회복하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의 IRA 정책 덕분에 미국엔 지금 양질의 일자리도 넘쳐난다. 5.25%라는 뾰족산 꼭대기에서 이제 하산만 잘해서 경제를 소프트랜딩만 시킨다면 제롬 파월은 성공한 연준 의장이 된다.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18일로 예정돼 있다. 연방준비제도가 위치한 워싱턴DC 기준으론 9월 18일 오후 2시다. 한국 시각으론 9월 19일 오전 3시다. 레던더리로 연준 역사에 남는 것이야말로 제롬 파월이 일평생 꿈이었다. 등산에선 하산이 가장 위험하다. 그 하산만 남았다. 하산만 잘 하면 된다.
온라인 인물 도서관 서비스 라이프러리의 인물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크로스보더 테크미디어 더밀크에 연재했던 제롬 파월 연준의장의 인물스토리입니다.
중소기업뉴스에 기고했던 칼럼의 원본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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