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보는 갤러리
'테마파크' 특정한 주제를 정하여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공간,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을 다시 생각하며 번뜩 떠오른 단어였다. 시각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공간을 만들고, 관람객이 작품과 호흡할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고자 했다는 아라리오의 철학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동문모텔1은 정말 최소한의 리노베이션 덕분에 작품 관람과 공포체험을 경험할 수 있다. 공간이 주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강력할 줄이야, 작품과 호흡하는 도중 놀라 자빠질 뻔하기도 했다. 사진을 다시 꺼내자니 그때의 기억이 생각날 것 같아 마음을 조금 붙잡고 후기해야겠다.
무채색의 동네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관으로 자리한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1관, 모텔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여관으로 그리고 지금은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한 곳으로 향했다.
관람시간
10:00 ~ 19:00(18:00 입장 마감), 월요일 휴관
입장료(성인)
동문모텔1,2 - 20,000원
탑동시네마/ 동문모텔1,2 - 24,000원
미술관 로비와 1층은 별다른 구분이 없다. 지하 1층부터 시작되는 전시를 보기 위해 정말 지하실이 있을 것 같은 지하로 향했다.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들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이제 땡땡이만 보면 야요이가 생각나는 병에 걸린 것 같다.
아라리오 동문모텔에서의 첫 작품은 '489 years', 한반도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는데 걸릴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DMZ 수색대 출신 군인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상작품이고,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level designer, lead artist, 3d modeler, sound designer, composer 등 많은 인력이 투입된 만큼 질 좋은 그래픽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군대 얘기는 역시나 재미가 없다. 예비군 훈련에서 듣는 안보 영상이 문득 생각났다. 489년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주는 의미와 아직 우리는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생각 정도만 챙겼다.
1층 전시관에서는 동문모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나의 공간이 여러 작가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처음이었지만 유명하다는 작가의 작품들도 더러 있었고, 굳이 하나의 주제로 묶여있지 않고 회화, 조형, 등 다양한 느낌으로 섞여 있어서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 손꼽는 미술품 컬렉터의 안목을 엿볼 수 있었다.
A.R. Penck <Dragon's Way, 1989, acrylic on canvas> <Voice G.S. 1989, acrylic on canvas> <대면 Konfrontation, 2005, oil on canvas>
Georg Baselitz <오렌지 먹는 사람 Orangenesser I, 2005, oil on canvas>
Kader Attia <무제 Untitled, 2018, ancient wooden Togolese sculpture and tin>
Antony Gormley <양자(量子)구름 XXII Quantum Cloud XXII, 2000, stainless steel bar> <우주의 신체들 I Bodies in Space I, 2001, forged ball bearings>
김구림 <도어가 있는 정물, 1977, charcoal acrylic on canvas> <인물이 있는 실내, 1977, charcoal acrylic on canvas> <바지와 옷솔, 1976, charcoal acrylic on canvas>
예술작품을 '만들다' 보다는 '고치다'라는 개념에 집중한다는 아오노 후미아키, 버려진 일상의 사물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복원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고 한다.
동문모텔에서 버려진 사물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어찌 보였는지를 작품으로 볼 수 있었다. 복원이라는 주제는 좋았지만, 일정한 패턴이 없어서일까? 버려진 사물은 역시 버려진 느낌이 가득했다. 한 작가의 작품이 하나의 층을 이루고 있어서 집중력을 잃지 않고 볼 수 있는 2층 전시관이었다. 그리고 높아진 집중력 탓에 곤두세워진 신경이 스산함 가득한 동문모텔을 느끼기 시작했다.
Aono Fumiaki <동문모텔 카운터의 복원, 2014,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동문모텔 방-A, 2014,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붉은 손의 사람, 2014, mixed media> <복원, 가족 초상화, 1991, plasterboard, mortar, paint> <복원, 나무 #1, 1991, plasterboard, mortar, paint> <붉은 옷의 사람, 2014, mixed media> <제주의 샘, 2014, mixed media> <복원, 나무, 1993, plywood, paint> <동문모텔 방-C, 2014,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동문모텔 방-B, 2014,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복원, 불에 탄 들판 #2, 1990, plywood, paint> <꿈꾸는 침대, 2014, mixed media> <뜯어진 긴 다리, 2014, mixed media>
무섭다. 제이크 & 디노스 채프만 형제는 파편화된 이미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존재의 불안성과 사회적 갈등을 작품으로 표출한다. 독일 장병들과 잔인하게 살해당한 시체들을 모형으로 만들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장난감에도 이러한 폭력성이 내재해 있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상업화시키는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한다.
전시를 보기 전 홈페이지에서 작품의 썸네일을 보았을 때는 키치한 느낌이 가득했거늘 기기괴괴하다. 최소한의 리노베이션으로 만들어진 날것의 공간과 너무 잘 어울리는 3층 전시관을 서둘러 벗어났다.
4층 전시관은 객실의 형태를 띤 공간들의 연속이다. 작은 볼륨의 공간을 한 작가의 작품으로만 채워놓으니 빠르게 환기되는 느낌이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 형태의 작품, 조명이 없는 공간, 폐모텔의 남아있는 흔적들이 섞여 형성하는 분위기는 귀신의 집을 온 느낌이었다. 많이 무섭다.
모텔의 구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속을 감추고 있던 하나의 공간에는 취향이 펼쳐져 있었고 빠지기 바빴던 기운이 슬금슬금 돌아오기 시작했다.
작품이라는 느낌보다는 오타쿠 친구의 컬렉션을 구경하는 듯한 첫인상이 강했지만 피규어나 게임 캐릭터, 대화 중에 일어나는 상황을 입체물이나 영상으로 만들고 서브컬처를 통해 미술을 재해석한다는 돈선필 작가의 공간이다.
그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피규어가 있다며 이름들을 흥얼거리고 있기 바빴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미술관에서 피규어를 마주한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 같다. 마냥 좋아하는 취향이어서도 있겠지만 작품보다는 상품의 느낌이 강한 피규어가 작품으로서 전시되고 있다는 것에는 어떤 의도들이 더 숨어져있을까 싶어 돈선필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봤다.
‘좋아하는 거나 하면서 살자’ 그저 노는 정도로 생각하던 프라모델, 피규어를 취미의 영역에서 작업의 맥락으로 끌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화가가 물감을 쓰듯이 작가는 피규어를 재료로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미술과 피규어의 접점으로 ‘쓸모없음’을 말하며, 이 둘 모두 형태 자체를 보는 경험을 강조할 뿐이지 소장하거나 감상하는 것 외에는 용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끽태점은 일본에서 볼 수 있는 킷사텐(고풍스러운카페), 만다라케(서브컬처중고상점)라는 상점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였다고 한다. 컬렉션처럼 보이는 이 공간 자체가 끽태점이란 상점 모습을 한 1:1 스케일의 피규어라고한다.
오타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확고하게 알고 있는 철학적인 존재라던 인터넷 글이 생각났다.
돈선필 <끽태점 명패, 2018, wood on japanese lacquer, pearl> <끽태점 C, D, E, 2019, figure, small sculpture, glass showcase, hardware floor box, LED light> <Next back door, 2019, resin, spray paint, surface, acrylic> <Decoy, 2019, figure, wood, spray paint resin, urethane foam, industrial product> <Debugging station (6/1 scale), 2019, figure, wood spray, resin, urethane foam, industrial> <My Vigor, 2012, figure, wood, spray paint, acrylic> <비디오영상 PlastiK> <Decoy_Cashier Man, 2020, resin, epoxy, acrylic sheet, urethane foam, steel, LED>
사진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여성문화 활동가 박영숙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끝으로 동문모텔의 전시를 마무리했다. 사진전의 메세지는 처음 혹은 마지막 사진에 담겨있다고 하는데 미술관도 그런 구성이 있다면 처음일까 마지막일까? 동문모텔1은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 '36인의 초상'이후로 이어지는 루이스 부르주아&트레이시 에민의 작품과 인터뷰 영상을 통해 좋은 마무리를 한 것 같다.
동시대 미술과 같은 걸음으로 살아가는 이상 계속 마주하며 이야기하게 될 페미니즘, 동문모텔1에서의 느낌 정도가 작품으로 접할 때 가장 좋았었다고 말하게 될 것 같다.
동문모텔 화장실 컬렉션... 층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조금 많이 이상하고 무섭고 그런데 최소한의 리노베이션이 이런 거구나 싶다.
공포를 동반한 동문모텔1의 전시가 끝이 났다. 개인의 소장품으로 이런 전시를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예술로 살아가는 삶의 정답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작품의 수며 미처 몰랐던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알게 되어서 좋았고 서울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의 미술관이라 더욱 좋았다. 화장실은 안 좋았다.
ps. 대가 없이 펼쳐진 산, 바다, 바람이 미술 작품보다 예술 같은 제주지만 아라리오 뮤지엄에 와보고 싶어서 왔다. 아니라면 좋아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