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온 후, 주위의 대부분 사람들은 '거리'에 대해서 많이 놀라곤 했다.
총 700km를 걷는다고? 매일 하루에 20km씩, 한 달을 걷는다고? 30km씩 걸을 때도 있다고?
아무래도 거리는 가장 표면적으로 보이는 지표이니까. 물론 거리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힘듦'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긴 거리를...?'이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대답한다.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나도 순례길을 걸을 때에 거리를 중요하게 확인했다. 오늘은 얼마나 가야 할까, 어디까지 가야 할까. 나의 몸 상태에 따라서 거리 조절도 정말 중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고도'와 '땅의 상태'였다.
'고도'는 정말 무시할 수가 없다. 평지의 경우에는 거리가 조금 길더라도 익숙해지고 나면 수월하게 진도를 뺄 수가 있었다. 힘듦도 비교적 덜하다. 하지만 산맥을 넘거나 언덕이 많은 날은, 오르막길을 오를 때부터 너무나 힘이 든다. 특히 배낭의 무게가 배가 되어서 누군가가 내 어깨에 앉아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무릎이 좋지 않은 나는 내리막을 내려가는 것도 무척 조심스럽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스틱을 잡고 한발 한발, 긴장을 하고 내려오다 보면 땀이 비 오듯이 나고 모든 힘이 빠지고는 했다.
또 '땅의 상태'도 중요하다. 사실 그동안 순례길을 걸으면서 대부분의 길이 흙길이거나 산길이었기에 땅의 상태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한 적이 없었다. 근데 산티아고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아스팔트 길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는데 그 '힘듦'을 오늘 경험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구간인 아헤스에서부터 부르고스는 23km'밖에' 되지 않았기에 우리 일행은 여유롭게 출발했다. '23km 정도야 껌이지!'라고 이야기하며! 그리고 이 말은 정확히 3시간 후 쏙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헤스에서 부르고스 사이는 순례길을 준비하며 늘 조심하라고 이야기 듣던 악명 높은 아스팔트 길이었다. 정말 끝도 없는 위성도시의 도로를 따라 그저 앞으로 걸었는데, 아스팔트의 딱딱함이 발바닥과 무릎을 괴롭히고 열기까지 뜨거워 정말 힘이 들었다.
짧은 거리임에도 다리가 너무 아프고 '정신이' 힘든 기분. 흙길이나 숲길은 바닥이라도 푹신하고 볼거리라도 많지.. 이 곳은 쌩쌩 달리는 차들에 뜨거운 태양밖에 없어서 더 힘들었다. 함께 걷던 Y님은 너무 잘 걸으셔서 그동안 어떤 길에서도 절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오늘은 '명상도 소용없는 길'이라는 명언을 남겨주셨다.
부르고스에 들어서서 알베르게를 찾으러 가는데도 너무나 큰 도시라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정말 부르고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너무 힘들었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다. 우리 일행 모두 나사 하나 빠진 사람들 마냥 웃으며 걷고 있는데, 친했던 외국인 친구들이 우리를 보더니 괜찮냐고 물어봤을 정도였으니까. 그 친구들에게 우리 너무 힘들다고.. 알베르게 언제 나오냐며 징징거렸던 생각이 떠오른다...
피레네 산맥도 넘어봤고, 하루에 30km도 걸어봤고, 수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즐비했던 날도 있었는데. 정말이지 이날의 힘듦이 최고였다.
이 날을 떠올리다가 든 생각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몇몇 사람들. 자신이 다 안다는 듯 말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상처를 주던 사람들이. 표면적인 지표만 보고서는 '에이, 이 정도야 괜찮잖아. 얼마 안 되는데 뭘!'이라고 그 속의 힘듦을 괜찮다고 치부해버리는 사람들. 정작 그 길을 걸어온 사람이 그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보지 않고 말이다. '나도 다 해봤어.', '남들도 다 하는 거잖아.', '그 정도는 괜찮지.' 어쩌면 모르고 하는 소리겠지만, 정말 힘들게 그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들이 정말 상처가 된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고 표면적인 지표만 보고 괜찮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 정말 위험한 일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의외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기 때문에 늘 그 사람들을 보며 '어쩜 저렇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근데 나조차도 그저 거리만 보고서는 '23km 정도야, 뭐!'라며 그 거리를 단정 짓다니... 아마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단정 짓는 일들이 많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어 조금은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부르고스의 무니시팔 알베르게는 시설이 너무나 좋아서 정말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힘들 때에는 간단하게 장을 봐와서 저녁을해 먹거나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먹고는 했는데, 오늘은 너무 힘들었기에 쉬는 대신 우리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이왕 대도시에 왔으니 현지인 맛집에 가기로ㅋㅋㅋ 부르고스에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모리토'라는 맛집을 갔는데, 힘든 와중에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해서 조금은 힘들었지만... 정말 양도 많고 맛도 좋았던! 특히 고기볶음(?)은 꼭 한국식 제육볶음 느낌이 나서 지쳤던 우리에게 힘을 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