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보다 더 짧은 거리를 갈 예정이었기에, 그리고 어제 너무 힘든 길을 걸었기에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그래 봤자 7시에는 일어나야 했지만ㅋㅋ (보통 알베르게의 체크아웃 시간이 8시다..!) 그래도 알베르게에서 제일 늦게, 8시에 출발했다. 들어올 때도 오래 걸렸지만 나갈 때도 오래 걸리던 부르고스.. 알베르게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나온 빵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걷다 보니 안양천 느낌.. 의 길도 나오고 오리 가족들도 만났다.
날씨도 좋고, 길도 좋고, 사람들도 좋고! 열심히 걷다 보니 도착한 오리니오스 델 까미노. 앗! 그런데.. 우리가 가려던 알베르게에 침대가 3개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결국 Y님께서 침대 하나 남은 옆 알베르게로 가서 쉬시기로 하셨다. (다음날 다시 만나 출발하는데, 오랜만에 가진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좋으셨다고 한다.ㅋㅋㅋ)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깨끗하게 씻고, 오늘은 간단하게 손빨래하고, 빨래 널기! "아 오늘은 햇빛이 좋아서 빨래 잘 마르겠다. 행복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던 날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나는 자연인이 되어가고 있다.
6시에 기상. 5분 만에 세수와 이 닦기. 어둠 속에서도 물집 치료하기. 간단하게 아침 식사. 출발 - 걷기(중간에 바 한번 정도 들리기) - 도착. 샤워. 빨래. 쌩얼로 마을 산책 겸 장보기. 저녁 식사. 수다. 잠자기까지 늘 반복되는 순례길에서의 하루 일상.
여행이 일상이 된다는 것. 참 특별한 일인 것 같다. 어느 광고 카피 문구에서도 여행 관련 책에서도 추천하던 것을 듣고 보며 '왜 여행지에서 살아보라는 거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왜 그곳에서 살아보라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름 여행을 많이 다녀봤지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여유로움은 없었다. 더 많은 곳, 더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쪼개고 잠을 줄이며 열심히 구경 다녔다. 성격적인 면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아쉬움이 컸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니까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조급함을 버리지 못했다.
근데 이 곳은 그런 조급함을 가지면 안 되는 곳이다.
처음에는 무리할 수 없다는 것이 싫기도 했다. '아, 더 빨리 가고 싶은데. 조금 덜 쉬고 힘들어도 마을도 둘러보고 싶다, 근처에도 유명한 곳이 있다던데 거기도 가보고 싶은데...'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지만 조급함 때문에 오늘 무리를 해버리면, 다음 날이 아니라 순례길의 일정 자체가 어그러져버리는. 그저 잠깐 여행이 아니라 일상인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컨디션 조절과 절제가 필요했고 여유로움을 '강제적으로'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첫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기에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래서 더 그리운 것 같다.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었기 때문에, 정말 내가 그곳에서 사는 느낌이었기에 더 그리운 느낌.
그리고 순례길의 단순함이 좋았다. 걷는 것이 일상이 되고 반복되는 그 길이. 이 길에서는 어디까지 걸어가고, 밥은 뭘 먹으며, 어디에서 잘 것인가. 고민할 거리가 이것뿐이었다. 그것도 그리 크지 않은 고민거리다. 걷고 싶은 만큼만 걸어도 되고, 알베르게는 많기에 어디든 내 몸 하나는 뉘어 쉴 수 있었으니까. 삶이 실제로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의 복잡함에 힘들었던 나에게 그 단순함으로 더 일상 같은 행복을 알게 해 준 곳이었다. 실제 일상에서는 좀처럼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까미노에서의 사소한 일상적인 순간에 그토록 감격스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빨래가 뽀득뽀득하게 잘 말라 기분이 좋았다. 건조기를 돌리지 않고도 뽀송한 옷을 입게 되어서 행복했다.
한국에서는 빨래가 잘 말랐다고 기분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빨래는 그저 집안일에 불과했었고 오히려 빨래가 마르지 않으면 짜증 냈던 기억밖에 없다. 빨래가 잘 마르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곳에서,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는 것에도 너무나 좋고 감사했다.
그런 행복이 좋았다. 그런 단순함이 좋았다. 그런 일상이 너무나 좋았다!
쉬게 된 오리니오스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는 특별하게 대형 빠에야를 요리해 모든 순례자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식이었다. 알베르게에 묵는 모든 순례자들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하던 저녁. 그리고 부르고스부터 걷기 시작한 S언니와의 만남도! 모든 것이 행복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