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lluda Jan 06. 2021

People Character 3 - 30년 묵은 사랑

나는 30년 묵은 사랑을 목격했다.


내가 닮고 싶은 30년 묵은 웃음

내가 30년 묵은 사랑의 모습을 직접 본 목격자가 된 것은, 결혼 후 일이 너무나도 바빠 잠자는 시간을 쪼개 여행을 다니던 나의 신혼시절이었다.

지친 몸으로 새벽에 집에 들어와 여행 가방을 쌀 때면, 가끔 이렇게까지 해서 여행을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몇 달 전부터 여행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하며 설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겉보기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비우는 내가 여유 있어 보이기도 했겠지만, 사실 내게 여행은 생존 방법 중 하나였다.

누군가가 살기 위해 챙겨 먹는 처방약 같은 내가 채울 수 있는 숨구멍이었다.




“35분 후면 목적지인 홍콩에 도착하겠습니다. 현재 홍콩의 기온은 19도, 날씨는 맑음, 시간은 오전 11시 30분입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주시고 귀국 시 중국산 과일, 육류는 반입할 수 없습니다.”

승무원의 또랑또랑한 음성이 기내 전체에 울려 퍼진다.

문득 승무원의 멘트를 한 자도 놓치지 않은 것처럼 이젠 내 삶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도 서로가 사는 곳을 옮긴 것 말고는 크게 다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였다. 보금자리라는 이름보다는 거주지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신혼집에서 각자의 일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서로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자신의 일을 사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는 일이 비슷해 결혼 후에도 늘 붙어 다녀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었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결혼하고 지금까지도 내 이름 석 자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 흔들릴까 봐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왔던 것 같다. 삶이란 결국 자기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선택하고 지키는 과정이니까.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륙하기 위해 창문을 내리니 비행 내내 함께 했던 생각의 조각들도 내릴 준비를 한다. 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짐과 함께 주섬주섬 챙겨 남편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다.

여행이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날짜와 장소를 선택하는 설렘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날짜도, 가고 싶은 곳도 미리 다 정해놓고 ‘이 옷에 당신의 몸을 맞추시오!’라고 호령하는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늘 바쁜 가운데 숨이 턱까지 차올라 이대로 가면 일속에 파묻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떠나는 여행이기에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몇 번 이용하다 보니 여행사에서 짜 놓은 시간표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융통성도 생기고 또, 무엇보다 그 여행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 여행 전의 설렘은 나중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빛이 내려 앉은 홍콩의 밤

변신의 도시 홍콩.

분명 같은 건물이지만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 확연히 달라져있음을 느끼게 하는 도시의 빌딩들, 시간마다 변하는 날씨, 한 번 보고 뒤돌아서서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도시.

나는 홍콩을 여행하면서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패션쇼의 모델이 생각났다.

홍콩의 낮이 화장을 지운 여인이라면,

홍콩의 밤은 화려한 화장 속에 세월의 흔적을 모두 감춘 여인이다.

 

바로 이런 곳에서 그 부부를 만났다.
처음 공항에서 만나 여행사 직원이 이름을 부르며 확인하고 출국할 때는 부인 혼자여서 난 그 여자분이 혼자 여행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홍콩에 도착해서 여행 일정을 함께 하다 보니 그분 옆에 어떤 남자분이 마치 남편인 것처럼 그 여자분을 살뜰히 챙겨주고 있었다.

‘어, 분명 혼자 오셨는데... 벌써 작업을 걸고, 작업에 걸리고ᆢ 세상 참ᆢ’ 

나는 혼자서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았다가 허물었다가 하는 것처럼, 그 부인을 놓고 독신녀를 만들었다 이혼녀를 만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저녁 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  알 수 없는 관계의 커플과 한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난 그분들이 결혼하신 지 30년이 넘은 진짜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서울에서는 분명 혼자 오셨는데, 제가 잘못 봤나 봐요?
- 아니에요. 집사람이 서울에서 혼자 온 게 맞습니다. 제가 출장 중이어서 일 다 보고 홍콩에서 만나 여행하기로 했거든요. 아내가 시부모님 모시고 집안 살림에 바쁘니까 제가 틈  나는 대로 시간을 쪼개 이렇게 무슨 작전처럼 여행을 한답니다.

 - 아, 그래서 서울에서 혼자 비행기를 타신 거군요.


무슨 작전처럼ᆢ

이 말을 하면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모습.

난 그날 처음으로 30년 묵은 사랑의 모습을 직접 본 목격자가 되었다.

내가  잠시나마 혼자 오해했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사과를 하자, 그 노부부는 크게 웃으셨고 우리는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직 결혼한 지 3년도 안 된 젊은 부부와 이제 결혼한 지 30년이 훨씬 넘은 노부부의 만남이었다.


- 아직 신혼부부 같으신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 네, 저희는 둘 다 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렇군요. 저는 조그마한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정신없이 일만 한 것이 후회가 되어 지금 이렇게 틈만 나면 여행을 한답니다. 두 분은 아직 젊으시니까 지금 하는 일을 더 오래 하고 싶으시다면, 신이 하는 일에 휴식 시간을 주세요. 그것이 일의 유통 기한을 연장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두 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젊을 때 여행은 시간만 있으면 돈을 빌려서라도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노후 대책입니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함께 여행을 하면서 난 그분들의 소박하지만 여유 있는 삶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마칠 때쯤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출장 중이셨던 남편분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당시 우리 남편이 갖고 있는 주식의 대표이사였다.

이름 앞에 나보다 더 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수식어를 힘겨워하지 않고 지켜 내는 모습을 보며 여행 가기 전 날까지도 일을 해야 하는 거냐고 투덜대며 여행 전의 설렘 어쩌고 운운하던 내가 참 많이 작아 보였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 앞에 붙은 수식어들을 노트에 적어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흔들리지 않게 힘주어 다시 한번 꼭꼭 눌러썼다.


지금 생각하면 구석기ㆍ신석기시대만큼 멀게 느껴지는 신혼이란 단어지만 그때 만났던  노부부 덕분에 지금까지 여행이란 말을 내 인생 속에서 빼지 않고 살고 있다.

남편이 그 회사 주식을 팔고 나서 한참을 잊고 있던 노부부였는데 그분들이 오늘 문득 생각나는 이유는 코로나로 한참을 거리두기 하고 있는 여행 때문이겠지.

노부부는 알까?

당신들이 누군가의 삶 속에 참 예쁜 모습으로 그림처럼 들어앉아 그들의 삶을 빛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여행.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익숙한 공간에서 내가 모르는 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

나를 아는 사람 투성이인 곳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  투성이인 곳으로 이동하는 것.

그래서 난 여행을 한다.

실수가 하고 싶어서ᆢ

잠시 나를 잃어버리고 싶어서ᆢ


익숙함과 낯섬의 만남




작가의 이전글 밥을 물에 말아먹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