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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uda Jan 20. 2022

People Character 4 - 수박 한 덩이

과거는 후회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내 이름 뒤에 선생이란 호칭을 처음 달게 되었을  때였던 것 같아. 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

넌 그때 얼굴이 지금 얼굴이잖아.

그래서 넌 지금이 더 젊은 느낌이야.

생각나니?

고2 여름방학.

너랑 남자 애들 몇 명이랑 샘 신혼집에서 숙식했잖아.

세상의 또 다른 성(性).

남자 , 여자, 그리고 고3.

난 고3이라는 새로운 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너희에게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조기 성(?) 교육을 시작했지.

하얀 전지에 하루 일과표 작성해서 거실에 붙여놓고 마치 전지훈련처럼 한 달을 보냈어.

하루를 등교 전, 학교 보충, 하교 후로 나누어 시간을 짜고, 매일 저녁 모의고사 풀고, 틀린 문제 질문받고 체크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옥상 고기 파티.

생각해보면 국어를 가르치는 샘이 수학샘과 결혼을 했기에 가능했던 자기 주도 학습의 끝판왕이었어.지금 생각해보면 절대 쉽지 않은 일을 너무 쉽게 시작했던 것 같아.

아침마다 계란 라이  판씩을 하며 영혼 없는 뒤집기를 하다가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빈속으로 가지 않고 식빵에 계란 라이 얹어 몇 개씩 꼭꼭 챙겨 먹고 가는 니들이 얼마나 고마운지.열정이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시간이었어.

난 가르치는데 열정이었고

너희는 배우는데 열정이었고.

비록 샘 체력이 열정을 못 따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합숙훈련은 막을 내렸지만 그 단 한 번의 조기 성교육이 지금의 너와 나를 만들어 줬어.


매 년 스승의 날마다 어른 머리통보다 큰 수박을 한 통씩 들고 찾아오는 너.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는 너랑 꼭 닮은 여자 친구를 데려와 이제는 너보다 그 친구가 더 기다려지게 만드는 너.

얼굴은 범인 얼굴인데 경찰이 되겠다고 하더니 결국 경찰이 되어 범인을 잡고 있는 너.

그런 네가 승진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데 참 기쁘더라. 내 일처럼.

위로해 주려는 사람은 많은데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요즘.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어 참 좋다.

갑자기지만 기다렸던 눈이 내려서일까.

금방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 눈을 보며

과거는 후회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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