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있었어.” “선생님, 저 오늘은 한 대밖에 안 피웠어요.” “정말? 이런 속도라면 이번 주 안에 끊을 수 있겠는 걸? 우리 해나 대단하다!” “할머니는 좀 어떠시니?” “선생님이 사주신 약 드시고 많이 좋아지셨어요. 할머니께서 선생님께 고맙다고 꼭 전해드리래요.” “고맙긴, 선생님이 오히려 더 고맙지. 우리 해나가 선생님하고 한 약속을 이렇게 잘 지켜 주는데. 참, 오늘도 동생 학교 데려다주고오느라 늦은 거야?” “…네….”
해나는 미안한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치마 위에 올려놓은 해나의 손가락은빠른 곡을 연주하는피아니스트의 손놀림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전 아이들 등교 지도가 있는 날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그녀는 아이들 교문 지도하는 것이 좋았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교사가 된 것이 자랑스러워 그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순수해서 좋았다. 오전 8시 20분. 아직은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8분 음표처럼 가볍다.
“혹시나 이름표를 깜박했는데 선생님이 교문에 서 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팔짱을 끼고 옆의 친구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척하며 들어오면 돼. 대신 다음엔 잊지 않고 이름표 달고 다니는 거다. 알았지?”
"네."
그녀는 수업 시간에 그녀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그녀는 아이들이 등교할 때 깜박 잊고 안 달고 온 이름표 부분에서만은 자유로울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교문 지도를 하는 날은 유난히 팔짱 끼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많다. 선도부 아이들이 교문 양쪽에 서서 교복을 단정하게 입지 않은 아이,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운동화를 신은 아이, 머리 염색을 한 아이, 마지막으로 이름표를 달지 않은 아이들을 가려내어 교문 한 옆에 세워 놓았다.그녀는 교문 양쪽에 서있는, 학생이면서도 교실로 들어가기까지의 길이 험난한자유로운 영혼들에게로 갔다.
“이름표 안 달고 온 학생들은 내일부터 꼭 달고 다니도록 하고, 치마 길이가 너무 길어 발목까지 오는 학생들은 내일까지 줄여서 입고 오도록 하고, 농구화는 농구할 때만 신도록! 내일까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학생은 들어가도 좋아.” 아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선도부 명단에 적히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교실로 뛰어들어간다. 아이들이 명단에 이름 적히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그녀는 안다. 명단에 적히면 학생부에 불려 가기 때문이고 그곳엔 그 유명한 ‘삼팔 광땡 박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사실 ‘삼팔 광땡’ 이란 별명은 그녀가 붙인 것이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오늘은 3단원을 나갑니다. 모두 38쪽 펴세요.”
그러자 아이들이 “앗, 38 광땡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뭐 38 광땡? 이제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이 38 광 땡을 어떻게 알지?’ 아이들은 38 광땡에 얽힌 사연을 그녀에게 말해주었고 그 38 광땡의 주인공이 교무실에서 그녀 옆에 앉으시는 학생부 박 선생님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박 선생님이 늘 충혈된 눈에 어떤 날은 지난밤 숙취가 가시지 않으셨는지 출근하시자마자 점심 메뉴로 북엇국을 찾으시던 이유가 무엇인지 늘궁금했었는데 이제 그 답을 찾았다. 그리고 전에 없이 학생부에 불려 온 아이들을 기분 좋게 타이르시고 그냥 돌려보낸 어제의 의아스럽기만 했던 행동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는 고스톱에서 선생님이 고와 스톱을 잘하신 날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들을그냥 타이르고 돌려보내는 것이 어쩌면 아이들과 ‘삼팔 광땡 선생님’의 만남을 주선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16분 음표로 빨라졌다. 정문을 닫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그녀가 해나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뛰어 오는 아이 속에 시· 공간을 초월한 듯 천천히 걸어오는 아이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학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복장과 태도를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아이였다. 노란 머리에 교복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 입고 목 올라오는 농구화를 신고 누런 광목으로 된 기저귀 가방 같은 걸 메고 선도부 아이들이 잡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는 그녀 앞에 제 발로 멈춰 섰다. 냄새가 해나보다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다. 싸구려 스킨 냄새가 났다. 한 가지 냄새가 아니라 여러 향이 섞인 듯한 역겨운 냄새였다. 교복 치마허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다. 치마를 너무 내려 입어 움직일 때 재킷 밑으로 언뜻언뜻 치마허리가 보이는데 치마 단추가 없는지 옷핀이 꽂혀있다. 힘주면 옷핀이 벌어져 맨 살에 찔릴 것 갔다. 그녀는 그 아이를 데리고 교무실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박 선생님이 아이를 보자마자 소리를 높이셨다. “너, 내가 또 걸릴 줄 알았어. 아유, 이 머리 하구 다니는 꼴 좀 봐라. 농구화 당장 벗고 너 오늘 맨발로 다녀! 알았어?” 아이는 대답이 없다. 박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는다고 그 아이를 또 혼내셨다. 그녀는 박 선생님께 “선생님, 이 아이 제가 타일러 볼게요.” “타일러요? 이런 애들은 말로 해선 절대 안 돼요. 선생님은 얘 못 당해요. 선생님 얘 안 가르치셔서 잘 모르시죠? 얘 완전 골초에 골통이에요.” ‘골초?’ 그녀는 그 말에 아까 그 역한 냄새가 담배 냄새를 가리기 위해 뿌린 스킨 냄새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박 선생님께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듣고 맨발로 돌아서는 그 아이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너 이따 점심시간에 상담실로 와.” 교무실보다는 박 선생님이 안 계신 상담실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매가 최고의 해결 방법이라 생각하시는 박 선생님께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그 아이를 변화시켜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해나가 왔다. 여전히 맨발이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상담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주었다. “몇 학년 몇 반? 이름은?” “3학년 8반 추해난데요.” 추해나인데 어쩔 거냐는 말투다. 추해나. 왠지 거북이가 생각났다. 늘 목을 안으로 넣고 있는 거북이. 그녀는해나의 목을 쭉 빼 주고 싶다는생각을 했다
“오늘 왜 지각한 거야? 특별한 이유가 있니?” “…….” “말하기 싫구나?” “…….”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선생님도 가끔 그럴 때 있어.” “저……” “그래. 말해봐.” “저 밥 먹고 오면 안 되나요? 종 치자마자 내려오느라 아직 점심을 못 먹어서.” “어? 그래? 그렇구나. 그럼 밥 먹고 이따 수업 끝나고 올래?” “네.” 그녀는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다. 학생들도 선생님처럼 아무 때나 비는 시간에 밥을 먹는 줄로 잠시 착각했다. 인사하고 나가는 해나의 발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난다.
"동생 데려다주고 오느라 늦었어요.” “어머니는?” “부모님은 안 계세요. 이혼하셨어요. 할머니랑 동생이랑 사는데 요즘은 할머니가 아프셔서 제가 동생을 학교에 데려다줘요.” 그녀는 해나 교복 치마의 떨어진 단추가 생각났다. “담배는……?” “그게…. 끊으려고 애를 써도 잘 안돼서….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전에 많이 싸우셨어요. 집에만 가면 부모님 싸우시는 소리에 머리가 아팠어요.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밖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노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저도 정말 담배 끊고 싶어요.” “그럼 생활은 뭘로 하는 거야?” “아빠가 생활비는 부족하지 않게 보내 주세요.” “아버님 하고 같이 살 순 없는 거야?” “아빠가 원양 어선을 타셔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볼 수가 없어요.” “아. 그렇구나.” 해나는 그녀가 질문할 내용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대답을 했다. 그녀는 해나가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해나야, 오늘 체육 들었니?” “네.” “그럼 얼른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교복 치마 줘봐.” 그녀는 가정 선생님께 빌린 바느질 도구로 해나 교복 치마의 떨어진 단추를 달아 주었다. “해나야, 교복 치마 단추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해나 학교생활을 선생님이 튼튼하게 새로 달아주면 안 될까?” “네?” “우선 담배부터 끊자. 당장 끊기 힘들면 하루에 한 개비씩 줄여가는 건 어때? 그리고 앞으로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오는 거야. 선생님이 해나 하루 궁금하지 않게.” 해나가 웃는다.
그녀는 해나의 수줍은 웃음에서 왠지 모를 차가움이 느껴졌지만기우라 생각하며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종이와 함께 휴지통에 버렸다.
해나가 왔다. 오늘은 담배를 하나도 안 피웠다며 해나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그녀의 코 밑에 가져다 댄다. 비누 냄새가 난다. 정말 담배를 안 피운 모양이다. 그녀의 눈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해나가 보인다. 해나는 분명성장하고 있다.
고등학교 입학 상담주간이다. 3학년 학부모님들 중에는 이때 처음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부모님들도 많았다. 학교에 오시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면 그 동네의 생활환경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5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는데 이 동네의 부모님으로 보기에는 너무 지적이고 고상한 옷차림을 한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앉아 계신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아마도 아이 성적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은 못 되나 보다. 그녀는 문득 해나 생각이 났다. 해나도 3학년인데 한 번도성적을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늘 상담실에서 조용히 해나를 만나다 보니 그녀와 해나의 은밀한 점심 미팅을 아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오늘은 해나 담임선생님께 해나 얘기를 좀 해 봐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잠깐 해나가 몇 반이지?’
그녀는 수첩을 꺼냈다.
‘8반. 8반 담임 선생님이 누구시더라? 아! 김정희 선생님이시구나.’
‘지금 상담 중이신가?’
그녀는 고개를 들어 김 선생님 자리를 살폈다. 그 고상하게 보이는 어머니와 상담 중이셨다. 조금 있자니 어머니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바쁜 걸음으로 교무실을 나가셨다. 그녀는 커피 두 잔을 타서 한 잔을 김 선생님께 권하며 물었다. “추해나 학생 선생님 반이죠?” “응, 방금 나가신 분이 해나 어머니신데, 해나는 왜?” “네? 저분이 해나 어머니시라고요? 해나, 부모님하고 따로 살지 않나요?” “무슨 소리야? 며칠 전에도 해나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네? 무슨 일로?” “해나가 집에 가다가 교회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그 걸 그 교회에 다니는 아빠 친구분이 보시고 해나 아빠께 전화를 드렸대. 해나 부모님이바쁘셔서... 두 분 다 의사시거든. 해나에게신경을 많이 못 써주셔서 걱정은 하셨지만 해나가 담배까지 피우는 줄은 모르셨던 거지.” 그녀는 계속 속으로 ‘네? 네?’를 외치며 김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네? 의사요? 해나 아버님은 원양 어선 타시는데’ ‘해나가 외동딸이라고요? 해나는 학교 데려다줘야 하는 동생이 있는데’ ‘할머니가 안 계시다고요? 해나 할머님은 지금 아파서 누워 계신데’ ‘해나가 아직도 담배를 피운다고요? 해나 담배 끊었는데. 이제 해나 손가락에서 담배 냄새 안 나는데’
그녀는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 쉴 새 없이 떨어 대는 해나의 오른쪽 다리가 생각났다. 그 무릎 위에서 빠른 곡의 피아노를 연주 하 듯 놀려대는 해나의 손가락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가 기우라 생각하며 종이와 함께 버렸던 해나의 차가운 웃음이 생각났다. 수업을 마치고 해나를 불렀다.
해나가 왔다. “해나야, 손 좀 줘 봐.” 해나가 얼른 오른손을 내민다. 이손이 아니다. 그녀는 해나의 왼 손을 요구한다. 해나는 다 안다는 듯이 왼손을 들어 그녀가 냄새 맡기 좋은 위치에 갖다 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