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동청소년기본소득 이어야 하는가
최근 우리 사회는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복지 모델을 논의하고 있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시행된 청년기본소득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이제 그 희망의 씨앗을 우리 사회의 가장 어린 세대에게 심으려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출생기본소득 3법' 과 기본소득당의 ‘아동 기본소득법’ 발의와 이를 위한 여러 단체의 활발한 논의가 그러하다.
이 움직임은 특정 정당이나 단체의 정책 제안이라기보다, 이미 사회 전반에서 싹트고 있는 세대 정의와 기회 평등에 대한 시대적 요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기본소득 논의가 성인 중심에서 벗어나 아동과 청소년의 삶의 질, 성장권, 사회적 참여권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작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 정책의 이름을 ‘아동기본소득’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한 약속은 반드시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이름이 담고 있는 법적 현실, 인권적 가치, 그리고 미래 비전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사회의 청소년들은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다르다. 가정의 소득, 부모의 학력, 거주 지역, 사회적 자본에 따라 누군가는 진로 탐색의 자유를 누리고, 누군가는 생계의 벽에 막힌다. 이 불평등을 개인의 노력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은 의지보다 환경이며, 환경을 바꾸는 일은 사회의 몫이다.
지금의 복지 체계는 선별적이고, 불안정하며, 무엇보다 ‘성인 중심적’이다. 청소년은 여전히 보호의 대상이자, 수혜의 대상으로만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이미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이며, 그들의 권리는 ‘미래의 준비물’이 아니라 ‘현재의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많은 논의에서 ‘아동기본소득’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나 ‘아동’은 주로 13세 미만으로 인식되고, 그 이후의 청소년기는 마치 자율적 존재인 동시에 보호 대상이라는 이중적 모순 속에 놓인다.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은 성장과 발달의 연속선상에서 모든 미성년 시민에게 동등한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자는 선언이다. 이는 단지 대상의 확대가 아니라, ‘성장기 전체를 하나의 사회적 주체로 인정하는 철학적 전환’이다.
청소년기는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고, 세상을 배우며, 사회적 관계를 실험하는 시기다. 이때 경험하는 경제적 자율성은 단순한 용돈이 아니라, 자기결정권의 토대이자 민주 시민의 훈련 과정이다. 그렇기에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은 인간 발달의 전 과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표현이어야 한다.
법은 종종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아이들의 삶 또한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아동복지법은 만 18세 미만을 ‘아동’으로 규정하며 보호 중심의 시각을 갖고 있다. 청소년 보호법과 소년법은 규제와 사법 판단을 위해 만 19세 미만을 ‘청소년’으로 본다. 한편 청소년 기본법은 성장과 자립을 돕기 위해 9세부터 24세 이하까지를 포괄한다.
이처럼 법마다 정의가 달라 혼란이 생긴다. 특히 만 17~18세의 고등학생은 법적으로는 ‘아동’이지만, 현실에서는 대학 입시와 진로를 준비하는 ‘청소년’이다.
만약 정책 명칭이 ‘아동기본소득’으로만 머문다면, 이 중요한 청소년기의 현실과 주체성이 정책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이라는 이름만이 이들의 법적 지위와 성장 단계를 함께 포괄하는 가장 현실적인 명칭이다.
“당장의 생계가 우선이다.”
아동 노동의 부당함을 이야기할 때마다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저소득층 가정에서 아이가 벌어오는 돈은 생존의 문제지만, 그것이 가난을 끝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대가로 교육의 기회와 심리적 안정을 잃게 되고, 가족은 ‘빈곤의 대물림’ 속에 갇힌다.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기회의 보장금’이다. 그 메시지는 단호하다.
“너의 노동 대신, 너는 배움과 성장을 선택해도 좋다.”
청소년들은 학교 밖 노동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학업과 병행하며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기 쉽다. 때로는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영리 목적의 반복 업무에 동원되기도 한다.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망을 제공하여, 유해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 학업과 창의적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이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미래 인적 자본에 대한 가장 현명한 사회적 투자다.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을 단순한 복지로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그것은 존엄한 성장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사회계약이다. 모든 아동과 청소년에게 정기적으로,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너는 보호받을 존재이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너는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기에 마땅히 갖는 권리”라는 선언이다.
이 기본소득은 청소년이 자신의 꿈을 탐색하고, 시도하며, 실패할 수 있는 여유를 보장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지원이 아니라, 청소년기 성장의 ‘시간과 가능성’을 되찾아주는 일이다.
경기도의 청년기본소득(4분기 신청기간: 25.10.15. ~ 25.11.24)은 만 24세 청년의 자립을 돕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이에 앞서 시행될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은 유아기부터 청년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만약 ‘아동기본소득’으로만 한정된다면, 만 18세 이후 청년기까지 정책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아동’에서 ‘청년’으로 이어지는 정책적 명분이 불명확해진다. ‘아동청소년’이라는 이름은 국가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명확히 전할 수 있게 한다.
“국가는 네가 성인으로 자립할 때까지 흔들림 없는 경제적 토대를 지원한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존엄한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다.
기본소득당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개념을 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이미 그 논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스스로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신뢰하고 지원하는 사회, 경제적 배경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출발할 수 있는 구조, 그것이 바로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이 지향하는 미래다.
다문화청소년, 장애청소년, 농어촌 청소년. 누구도 예외 없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중받는 토대를 만드는 일! 그것이 기본소득의 진정한 의미다.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은 복지의 새로운 장이 아니라, 공존의 사회를 향한 철학적 선언이다. 한 세대의 평등은 다음 세대의 정의로 이어진다. 청소년이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사회, 그 희망이 가난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그곳이 바로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길이다.
나는 공학적 배경 위에 아동청소년교육을 전공한 박사로서, AI 시대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 양성을 고민하고 있다. AI 시대의 인재는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은 그러한 기회의 토대다. 다문화청소년의 부모지지 연구에서도 확인되었듯,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교육 복지 정책이기도 하다.
이 제도가 뿌리내린다면, 우리는 단순히 돈을 나누는 사회가 아니라 아이들의 꿈과 성장을 사회의 중심 가치로 두는 나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정하는 이 이름은 곧 미래 세대에 대한 약속이다. ‘아동기본소득’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이라는 넓고 단단한 기반 위에서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한 약속, 이제 ‘아동청소년기본소득’의 이름으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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