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질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무려 118일의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나에게, 서울의 집은 너무나 그대로였다. 너무 그대로라서 기분이 요상하게 나쁠 지경이다. 이리저리 쌓아둔 책들은 물론 이미 지나버린 계절의 옷들이 차지하고 있는 옷장도 무서우리만큼 그대로였다. 뭔가 크게 느껴지는 차이가 있다면 여행이 실감이라도 날 텐데, 이 '그대로'인 공간 덕분에 4개월에 가까운 여행이 한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돌아오는 비행길은 고단했다. 한 시간의 연착 뒤에 두 시간의 연착이 더해졌고, 여기저기 나오는 불만에 나도 동조하고 싶은 마음과 그보다는 '아, 그냥 비행이 취소되어서 며칠이라도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몇 시간 만에 이륙한 비행기는 난기류에 덜컹거리고 덕분에 잠을 자지 못한 채 9시간의 비행을 견뎠다.
반수면 상태로 꼼지락 거리며 좁은 내 자리에서 지난 여행을 돌아봤다. 원래 계획과는 많이 다른 여행이었다.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았다. 여행의 시작단에서는 기대해왔던 것만큼 기쁘지만은 않아 뭔가가 잘못되었나 싶기도 했고, 그럼에도 순간순간 놀라울 만큼 행복할 때가 있었다. 이는 분명 이전의 여행과 비슷한 부분이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의 모든 순간이 분명 좋지만은 않으니까.
그러나 이전의 여행과 다른 점이 있었다. 외면하기에는 어딘가 아주 큰 차이점이. 그게 무엇인지는 유난히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그제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유예하고 있었다. 지금 내 나잇대의 대부분의 이들이 열심히 달려가는 그 길을. '취업'이나 '각종 시험' 등 모두가 알고 있고 대부분이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것을, 여행을 이유로 유예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잠깐의 시간을 가지고 호흡을 고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는 나는 딱히 계획도 없었다. 다만 지금 쉬지 않으면 그대로 색깔 없었던 20살 언저리의 나로 돌아가버릴까 봐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이전과 달랐던 점은 내가 유예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그걸 위해 쓰고 있는지 말이다. 다른 이들이 내 유예를 바라보는 시선과 걱정 어린 말들 역시 꽤나 신경이 쓰였다. 여행 후에는 다시 그 용감하고 대책 없는 나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애써 유예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너는 계획이란 게 있구나' 하던 영화 속 대사를 듣고 싶은 것 마냥 급하게 어학 과외를 찾아보며 통장잔고를 확인하는 내가 있었다.
억지로 유예를 더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급하게 달려가다가 체하고 싶지는 않다. 급했던 결정들이 나중에 어떻게 나를 힘들게 하는지는 이미 겪어보았으니. '너는 계획이 없구나'라는 말이 누군가의 삶을 게으름과 대책 없음으로 단정 짓는 말이 아닌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다만 무수한 가능성이 계획만큼이나 멋진 것이 될 수 있기를. 혹은 멋지지 않아도 정말로 괜찮은 때가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