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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이니 Mar 29. 2020

그만두겠습니다

이러다 언제 집을 사고 차를 사냐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매운 걸 먹는 거, 비싼 옷을 사는 거, 데드라인이 닥치기 전에 일을 미리 하지 못하는 거 등등.


그중에서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영 못하겠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을 뱉는 거다. 1년 하고도 반을 일했던 첫 직장에서 그 말 하나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딱 1년만 채우려고 했던 곳인데, 그 말 하나를 못해서 몇 개월을 더 다녔으니.


"그만두겠습니다"


막상 팀장님을 불러 '퇴사 의사를 알릴' 자리를 만들었더니,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닐 이유보다 못 다닐 이유가 많았던 그곳에서 버틸 만큼 버텼음에도 그 한마디 말이 나오질 않아 아주 긴 서론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사실 제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참 오래 걸렸는데요. 사실 팀원 OO가 나가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결정했던 일이었는데요. 물론 이런 점에서는 회사가 참 좋은데, 이런 부분이 저를 힘들게 해서요. 팀장님 말고는 모두 다 알고 있던 나의 퇴사 의지에 대해 굳이 납득시킬 필요 없이 의견만 전하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최선을 다해, 애를 써서 설명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빙빙 둘러말하는 걸 싫어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둘러말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 그러니까 다름이 아니고요. (너무 힘들어서) 퇴사하려고 합니다.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은 끝에 드디어 그만두겠단 말을 꺼냈지만 팀장님의 사정에 넘어가 1개월을 더 일했다. 볼꼴 못볼꼴 다 보고 결국은 무사히(?) 퇴사했으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도대체가 그 한마디가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지금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다.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이 내 발목을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무수히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근무기간이 정해져 있는 일이 아닌 경우에는 그만둬야 할 상황이 닥칠 때마다 그 말 하나를 못해 혼자 끙끙 앓았다. 괜찮다가도 그 이야기를 꺼낼 생각에 체하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일했던 한 카페에서는 그만두겠다는 말을 못 해 무려 3년을 일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취업 전까지 일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사이에서 자발적 노예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거 진짜 문제구나. 


여전히 그만두겠습니다(=더 이상 못해먹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여러 번 애쓴 끝에 한 가지 얻게 된 작은 인사이트가 있다면 바로 나 없어도 이 곳은 어떻게든 잘 돌아갈 것이란 거다. ‘그만두겠습니다’ 라는 말을 늘 힘겹게 여겼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나 말고 이 일을 할 사람이 있을까. 나만한 사람이 없을 텐데. 이렇게 그만두면 사장님(혹은 동료)이 너무 힘들 텐데'였다. '가게도 바쁜데 또 사람 구하고 일 잘할 수 있게 교육하고, 동료들도 힘들고 점장님도 힘들겠다. ' 뭐 이런 세상 이타적인 생각들이 그 말 하나를 그렇게 어렵게 만들었더랬지.


쓰라린 사실이긴 하지만, 남 걱정만큼 쓸데없는 일이 없고. 나만큼은 모르겠지만 일을 배워서든 어떻게서든 일이 돌아갈 만큼 해낼 사람은 많다. 그만두기 전날 밤, 눈물 흘리며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쪽지를 써 초콜릿 과자와 함께 전달했던 첫 아르바이트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여전히 카페는 잘되고 있으니, 아마도 내 뒤로 많은 사람들이 아르바이트생으로 그곳을 거쳐갔을 거다. 자발적 노예가 될 만큼 애썼던 아르바이트생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참 부질없는 걱정이었구나 싶다. ‘그만두겠습니다'는 여전히 아직도 어렵다. 몇 번의 그만둠이 쌓여야 편해질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하느라 뒤척이며 밤을 새웠던 그날들의 나에게 그냥,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더 이상 못해먹겠을 때, 그때는 나를 조금만 더 생각하자.

드라마처럼 멋지게 사직서는 못 던지더라도 적어도 눈 똑바로 보고 흔들리지 말고.


그만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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