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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이니 Apr 25. 2022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클럽

그 작가는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는 '인생 OOO'가 넘쳐나는 편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손꼽히는 인생 영화, 인생 드라마, 인생 작품 등등등. 그러니까 뭘 보든 뭘 듣던 간에 대부분 최악은 없고 중간 이상은 간다는 뜻이다. 굳이 말하자면 점수가 굉장히 후한 편이랄까.


'이것도 인생 드라마라고?'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다소 머쓱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 이제는 나름대로의 넘버링을 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2020년 상반기의 인생드라마, 작년 하반기의 인생 영화 등으로 소소한 인덱스를 붙이는 거다.


그래서 말인데,

4월 기준 올해의 인생드라마는

단연 <나의 해방일지>이다.


1화와 2가 꽤 지루하고 느린 호흡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는 6화의 창희(이민기 ) 대사처럼 서서히 '스며들어'  인생 드라마가 됐다. 아이  딸린 재벌이 기억을 잃는 플롯이나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잃어버린 남매였거나 하는 클리셰는  드라마에 없다. 대신 ' 정도라고?' 하게 만드는 경기도민의 고단한 출퇴근 씬과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날씨  느리게 전개되는 대사만이 있을 뿐이다.


이 드라마가 좋은 이유의 9할은 대사 때문이다.


주절주절 늘어놓는 방백들이 내 일기장을 고스란히 훔쳐다 옮겨놓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해 일종의 강박 때문에 일기도 솔직히 못쓰는 편인데,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꼭 일기장을 검사할 것 같다- 이 대사들은 그 정제된 문장으로 쓰인 일기장보다도 더 적나라하다. '나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 당신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추앙해라. 사랑 만으로는 안된다. 추앙해라. 봄이 되면 분명 바뀌어져 있을 거다.' 하고 당돌하게 말하는 미정(김지원 역)도 그렇고. 아쉽다 싶으면 거르고 거르다 보니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는 기정(이엘 역)도 다 나 같다.


어떤 시기를 살았던 '나'거나 혹은 지금의 '나'를 조금씩 닮아있다. 흠잡을 곳 없는 배우들의 연기도 한몫 한다. 화려한 의상도 없고 비싼 차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흙먼지가 계속 날릴 것 같은 땅과 10분도 채 서 있고 싶지 않은 뜨거운 햇볕 아래 지친 삼남매와 성실한 부모만이 있을 뿐.



어쨌든 드라마는 드라마라 미정은 일종의 사건을 만들어간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제목은 여기서 등장한다. 사내 동아리에 꼭 가입해야 한다는 지독한 압박에 미정은 꼭 본인 같은 사람 2명과 -일종의 사회화에서 낙오된 사람들처럼 그려진다- 함께 '해방클럽'을 만든다.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는 이 해방클럽에서 쓰는 일종의 보고서 같은 거다. 뭐든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해방클럽. 소설 같은 이 해방클럽이라는 단어는 나를 툭, 치고 말았다.


작가는 '해방'이든 '추앙'이든 요새 영 보기 힘든 단어들을 굳이 굳이 대사 속에 사용한다. 그러면서 삶에 절어있는 인물들을 통해 계속 얘기한다. 누구든 한번 쯤은 생각했을 것들, 그리고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그런 생각들을.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말들을 하는지, 그 말들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그 의미 없는 말들을 뱉다보면 거기에 답하기 위해 또 얼마나 의미 없는 말들을 하는지. 뭐 그런 것들.



요즘 사실 내 마음 상태가 영 좋지 않다. 학창 시절 배우던 싸인, 코싸인 그래프처럼 오락가락하는 모양새가 평상시의 심리 상태라고 하면 그 그래프가 도통 올라오지를 않는다. 대개는 낮엔 괜찮다가 밤엔 우울해진다. 해가 있는 동안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니지롱!하며, 해가 저무는 동시에 와다다다 하고 달려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 드라마는 위로가 된다. 평상시에는 로맨스도, 드라마나 영화를 이루는 일종의 '사건' 같은 것도 시시하기 그지 없는데 이 드라마는 그냥 내 일상의 연장선 같다. 퇴근 시간 지하철을 타고 가는 어떤 순간에 휴대폰을 볼 힘도 없이 창밖을 가끔 쳐다볼 때, 그때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옆사람, 그리고 그 옆옆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비슷한 일들이 또 있구나 하는 마음은 종종 위로가 되곤 하니까. 괜히 내 현실에서도 해방클럽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관심을 표방하지만 철저하게 무관심한 그 무의미한 대화들 대신에 뭐가 필요한지, 뭐로부터 해방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찾아가는 그런 모임을 말이다. 직업이나 나이, 취미 같은 뻔하디 뻔한 클리셰 대신에 진짜 쉬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모임.



p.s. 알고 보니 내 1943번째 인생 드라마였던 <또 오해영>의 작가였다. 그때도 그렇게 사람 후벼파는 대사를 쓰더니, 취향 참 안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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