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 끊겼습니다
가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화가 끓어오를 때가 있다. 대개는 말그대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럴 때가 많고, 간혹 할 수 있더라도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감정이 그렇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맥북 충전기의 묘연한 행방 때문에 갑작스레 화가 났고, 그 화를 주체할 수 없어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이다.
연차를 써서 쉬었던 월요일을 제외하고 나머지 요일들을 모조리 야근에 썼다. 나만 기다리는 노견에게 산책도 못시켜주고, 침대에 머리만 대면 잠이 쏟아져 쓰러지는 나날의 반복. 다음날이면 피로를 풀지 못해 잔뜩 무거워진 몸을 끌고 다시 출근을 했고,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찾아온 유일한 휴일인데!
도대체가 내 맥북 충전기를 찾을 수가 없다. 머리를 굴려봐도 기억이 전혀 안난다. 금요일까지는 있었던 것도 같고, 아니다. 토요일까지는 충전기를 약간 본 것도 같다. 테이블에 뒀던 것도 같고, 아니 회사 책상 아래의 콘센트에 꽂아두고 왔던 것도 같고. 아무리 기억을 돌려봐도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술이라곤 입에도 안대는 나인데, '필름이 끊겼다'라는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실수로 가져갔을 수도 있으니 이곳저곳 수소문을 해봤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사실 이번주의 일요일은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휴일이었다. 주말의 낙이라고는, 반려견과 함께 한적한 카페에 읽지도 않을 책 한 권과 노트북을 가지고 가는 것 뿐인데 말이다. 노트북 하나면 못할게 없다. 밀린 글도 쓰고 취미로 하는 유튜브 편집도 하고(언젠가는 뜰 것이라 믿으며), 이것저것을 살펴보다 결국 온라인 쇼핑으로 마무리 되는 그 소소한 행복이 충전기 하나 때문에 와장창 깨지고 만 것이다. 사야 하나 하고 살펴보려고 하니, 비싼 돈을 쓰면 내일 뿅! 하고 나타나버릴 것 같아 못 사겠고. 그러다가 노트북을 두고 가려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결국은 편의점에서 8,000원 하는 충전잭을 하나 사서 꽂아 글을 쓰는 중이다.
분명히 충전중인데, 충전중이 아니라고 한다. 배터리가 차는 속도도 느릿느릿 이렇게 느릴 수가 없다. 노트북이 꺼지지는 않는데 여전히 2%라는 글자만 떠있다. 충전 잭을 빼면 '맥북이 곧 잠자기 모드가 된다'고 하니,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완전히 종료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충전되지도 않는게 꼭 요즘의 내 모습 같기도 해서 서글픔도 밀려온다. 아마 이 이유 없는 화와 서글픔이 꼭 맥북 충전기를 찾지 못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계획하는대로 되는 건 없고, 온갖 변수만이 어느 골목길에서 기다리다가 내 모든 계획을 깨버리려고 벼르고만 있는 것 같다. 정품 충전기에 들어갈 돈이 아까워 중고품을 찾는 내 모습이 처량하고, 몸은 피곤하고, 할일은 태산이고 당장 내일은 월요일이고. 뭐 그런 상황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맥북 충전기가 애꿎은 심지가 된 걸거다.
그래도 뭐 안 꺼지니 다행이지 뭐. 그렇게 생각하자.
오늘은 아직 일요일이고 나는 배터리 2%를 유지하며 간신히 돌아가는 사양 좋은 노트북이 있다. 그리고 충전기 때문에 화난 마음을 부여잡고 아주 오랜만에 브런치 글도 써냈다. 내일은 월요일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월급날이기도 하고 말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맥북 충전기가 없어 화가 나더라도 오늘 하루가 최악이 될 필요는 없다.